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나님의 꿈을 살다 2010년 05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하나님의 꿈을 살다

-서영남의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 하나>>

 

“세상의 일은 모두 하느님이 계획하시고 사람은 그저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일을 벌이면 마무리는 언제나 하느님이 하신다. 내가 돈도 없고 대책도 없이 일을 벌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빽’을 믿기 때문이다.”(187)

“사랑은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기준이 되는 생활방식이다. 행복하길 원하면 보잘것없는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보잘것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은 내 스스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일깨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265)

 

2004년 4월 1일 만우절

 

앞치마를 두른 채 문밖에 서서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환한 미소가 따뜻하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대접하는 서영남 전직 수사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 하나>>의 표지 사진이다. 책 앞날개에 적혀 있는 그의 프로필을 훝어본다. “1954년 부산 범내골에서 태어나 1976년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입회, 1985년 종신서원을 하고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졸업하였다. 1995년부터 전국의 교도소를 다니며 장기수 면담활동을 하고, 2000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에 파견되어 출소자의 집인 ‘평화의 집’에서 형제들과 함께 지냈다.” 그 다음의 이력은 뜻밖이다. “2000년에 25년간의 수사 생활을 마감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환속했다.” 뒷부분에는 환속 이후 그가 걸어온 삶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범상치가 않다. 이게 뭐지 싶은 마음에 첫 장을 넘기면 작은 십자가 고상 밑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예수께서도 노숙인이셨다.” 무방비로 만난 글귀에 잠시 멍해진다. 하지만 곧 ‘그렇지, 예수도 노숙인이셨지’,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배고픈 이들에게 무료로 밥을 제공하는 거짓말 같은 식당이 문을 연 날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노숙인들이나 배고픈 이들에게 국수라도 대접하자는 생각에서 ‘민들레 국수집’이라는 간판을 걸었지만, 며칠씩 끼니를 거른 이들에게 차마 국수만 대접할 수 없어 밥을 짓기 시작했으니 ‘민들레 국수집’은 ‘국수’없는 국수집이 된 셈이다. 하루 민들레 국수집에 다녀가는 이들이 400명에 이른다니, 성공한 식당임은 분명하다. 이 국수집 주인 서영남 씨가 차분하게 털어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이 척박한 시대에도 기적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왜 이런 일을 시작했을까? 민들레 국수집 손님이었던 영수 씨도 그 점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국수집 앞에 있는 교회 계단에 앉아 있던 영수 씨는 “난 평생 힘들게 살았어요.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던 서영남은 “글쎄요, 이유가 없어요. 그저 제가 옆에 있으니까요.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거지요”라고 답한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돕거나,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는다. ‘이유가 뭐예요?’ ‘어떤 관계예요?’ 질문을 하는 이들은 ‘그냥’ 혹은 ‘그저’라는 대답에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이처럼 이유 없는 친절이 의혹어린 시선을 받는 시대에 산다. 자꾸 이유를 묻는 영수 씨에게 서영남은 “음, 영수 씨 건강하게 만든 다음에 고깃배에 팔아먹으려고요”(12)라고 대답한다. 그제서야 영수 씨는 그 친절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언표된 말 너머에 깃든 우정과 사랑에 접속됐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도 받지 않고, 후원회 조직도 안하고, 프로그램에 공모도 하지 않고, 부자들의 생색내기 자선이나 기증도 물리치는 민들레 국수집이 망하지 않고 버티는 비결은 무엇일까? 개인의 자발적인 나눔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힘(21)이라는 못 말리는 믿음이 아닐까? 그렇기에 민들레 국수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음식 재료가 떨어질까 늘 조마조마하지만, 꼭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씩 공급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내어 드리고 나면 꼭 필요한 만큼 또 다시 들어온다. 그릿 시냇가로 떡과 고기를 날랐던 까마귀는 지금도 여전히 현역이다. 희망은 늘 위태롭다. 위태롭기에 더욱 소중하다.

 

사람대접

 

민들레 국수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대접에 소홀함이 없기 때문이다. 민들레 국수집은 무료 급식소가 아니라 환대의 집이다. 곤궁하고 낙심한 사람들의 문제를 직접 처리해 줄 수는 없지만, 찾아온 손님 하나하나를 ‘하느님이 보내주신 고귀한 분’으로 여기고 대접한다(59-60).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따뜻하게 사람대접을 해 줄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민들레 국수집에서는 손님이 아무리 밀려와도 줄을 서지 않는다. 세상의 줄서기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그곳에서조차 줄을 서서 선착순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면 그처럼 끔찍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배고픈 사람이 먼저 밥을 먹게 하면 서로를 배려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민들레 국수집을 찾는 이들은 인정머리 없는 잔소리를 들을 염려도 없고, 긴 설교나 기도로 기분 잡칠 일도 없다.

 

민들레 국수집을 찾는 노숙인들은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도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서로를 친근하게 호명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국수집 주인 서영남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이름과 나이를 묻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은 그들을 한 개인으로 존중하기 위해서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 손님들은 어느새 자기 존재감을 잊으면서 홀로 설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하기 쉽다. 그래서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손님들 스스로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할지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조금씩이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게 되고, 서서히 살아갈 의욕을 얻게 된다.”(51)

 

서영남은 국수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이름을 마치 시험공부 하듯이 열심히 외운다.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한다는 것은 그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연루되지 않기 위해 가급적이면 그들을 외면하고 산다. 연루되는 순간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영남은 그들을 김씨 이씨 장씨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다. 부활절 아침 예수의 무덤을 찾아왔던 마리아는 주님이 ‘여인아’ 하고 말을 건넸을 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주님이 ‘마리아야’라고 부르는 순간 주님을 알아보았다.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순간 노숙인들은 자기 생의 주인으로 호출되고 있음을 자각할 것이다.

 

서영남은 경쟁사회에서 밀려나 어둠 속에 유폐된 이들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 사회의 축약판이다. 그들은 친절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이기심을 드러내 보이고, 때로는 야비하거나 거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세상살이가 그들의 몸과 마음에 남겨놓은 고통과 열패감은 쉽게 아물 수 없기 때문이리라. 민들레 국수집을 하는 동안 서영남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술 취해서 다른 손님을 못 살게 굴거나 음식을 접시에 잔뜩 담아놓고 남기는 손님들, 다른 사람이야 기다리든 말든 좁은 식탁을 혼자서 독차지하는 밉상 손님들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술 한 잔 들어가면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변해버리는 손님들에게 강아지, 송아지 등 온갖 욕설을 듣기도 하고, 멱살을 잡혀 끌려다니기도 했지만(235) 서영남은 그들을 VIP라 부른다. 사람이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노숙인들 중에 술이나 경마에 빠져 사는 이들이 많다. 고단하고 참담한 현실과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는 왜 술을 먹느냐는 어린왕자의 질문에 ‘부끄러워서’라고 대답한다. 왜 부끄럽냐는 질문에는 ‘술을 먹는 것이 부끄럽다’고 대답한다. 악순환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깨뜨릴 힘이 없다. 세상살이에 대한 희망을 일찌감치 접어버린 정호 씨가 그렇고,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를 힘들어 하는 이슬왕자 정근 씨가 그렇다. 그런데도 서영남은 그런 이웃들에게 술을 따라 주기도 한다. 오직 술 한 잔이 위로였던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서영남은 가끔 불법을 조장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골판지를 모아 사는 이에게 가끔 값나가는 것을 슬쩍하지 그러냐고 말하기도 하고, 밥집을 찾아올 여비조차 없어 먼 길을 걸어오는 이들에게는 무임승차를 하는 방법도 슬쩍 일러준다. 엉너리를 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안타까움에서 우러나온 말임을 그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우공(愚公)

 

서영남의 일은 밥을 지어 먹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민들레 국수집이 쉬는 날에는 전국 각지에 있는 교도소와 감호소를 찾아간다. 최고수들이나 장기복역중인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수사 시절에 시작했던 교정사목활동은 환속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들의 가족이 되어주는 일이야말로 서영남과 그의 아내 베로니카가 가장 깊이 마음 쓰고 있는 일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필요한 물건을 보내고, 영치금을 넣어주고,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눈빛 사납던 제노비아는 베로니카의 옥바라지 10년을 받고는 자기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왔다. 서영남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겨우 10년 만에 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140)고 말한다. ‘겨우 10년’이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어머니께 불효한 것을 항상 마음 아파하는 꼴베 형제를 대신해서 그들 부부는 매년 어버이날이 되면 꼴베의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고, 아들 대신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곤 한다. 15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그도 또한 아름답게 변했다. 꼴베 형제가 19년 동안 교도소 공장에서 매월 7만 원 정도씩 받은 작업수당은 지금 ‘0원’이다. 찾아오는 이 없는 재소자에게 넣어주고, 민들레 국수집의 후원금으로 내놓고, ‘민들레 꿈’ 공부방 아이들 학용품을 사라며 다 보내주기 때문이다(144).

 

한 사람이 참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서영남은 사람의 힘으로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사람이 바뀌는 경우는 자기 스스로 바뀌는 것과 하느님이 바꿔주시는 것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안 하시는 게 있다. 본인 스스로가 안 하면 하느님도 못하신다. 스스로 변해야 한다.”(73) 서영남에게 교정사목이란 새 삶을 꿈꾸며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이들을 옆에서 약간 거들어주는 일이다.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넘어지고 상처입고 좌절할 때가 많다. 툭툭 털고 일어서야 하지만, 넘어짐을 반복하다 보면 일어설 생각조차 잃어버리기 쉽다. 원망과 미움에 은결든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또 넘어졌냐고 탓하지 않으면서 기다려주고 가끔은 일어서도록 붙들어주기도 하는 이웃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진정한 변화는 성장을 돕는다고 벼를 잡아당겼던 송나라 사람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우직함으로 산을 옮겼던 어리석은 노인의 근기 속에서 움터 나온다. 서영남은 이 시대의 우공(愚公)이다. 반지빠른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우직함은 패배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그런 세상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이들에게는 참 삶에 이르는 길이다.

 

꿈을 꾸게 하는 사람

 

꿈이 절실하면 상황은 따라오게 마련인가? 수사 시절 그는 수도원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수도회의 중요사업들을 결정하는 참사위원회에 ‘달동네 공동체 계획안’을 안건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 안건은 부결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퇴회를 신청했다. 그는 여전히 수도원을 복음의 정신이 발현되는 곳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조직이나 제도에 너무 얽매이면 복음정신을 망각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165) 있음도 경험했다. 퇴회 후 인천의 한 여관방에 머물고 있던 그를 찾아온 출소자들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그들의 보금자리인 ‘겨자씨의 집’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어 할 때 그를 찾아온 이가 지금의 아내 베로니카이다. 교정사목 활동을 하던 시절부터 알았던 베로니카는 너무나 힘겹게 지내는 서영남에게 자기 집으로 들어올 것을 권한다. 베로니카와 딸 모니카, 그리고 서영남 베드로는 한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기쁨,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이라는 가훈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로 다짐했다(154). 그 가정은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함께 축배를 들 줄 아는 축제의 공동체이다. 서영남이 그 힘겨운 일들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가정으로부터 공급되는 에너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교도소를 찾아다니고 노숙인에게 밥 한 끼 대접하면서 느낀 것은 ‘아이 때부터 돌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범죄자들은 대개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를 다닐 나이에 이미 막바지 인생을 살더라는 것이다. 한번 자포자기의 경계를 넘으면 돌이키기 어렵다. 그는 “아무리 비뚤어진 인생이라도 아이 때 5년, 10년 정도 사랑을 쏟으면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186)고 믿는다. 따뜻한 가정과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조그마한 집을 만들자는 꿈은 이렇게 잉태되었고, 그 꿈은 ‘민들레의 꿈’이라는 집으로 결실했다. 민들레 꿈 공부방 아이들은 시나브로 변하는 어른들에 비해 기적에 가까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시민운동을 하는 이들이 재정난에 허덕이는 것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까웠다. 그래서 ‘뜻이 있는 사람은 돈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은 뜻이 없다’고 탄식하곤 했다. 그런데 이 말을 이제는 수정해야겠다. ‘뜻이 확고하면 돈은 따라오게 마련이라고.’ 교회가 커야 큰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신학생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고함치듯 “하나님의 일은 뜻으로 하는 것이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일을 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데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돈이 없다는 핑계로 무지르곤 했다. 큰 소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서영남이 꾸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은 다른 이들도 꿈꾸게 한다.

 

기적은 있다

 

영연방 유대교 최고 랍비인 조나단 색스는 이스라엘이 언약공동체로 탈바꿈한 것은, 애굽에서 경험한 이적 때문도, 광야에서 맛본 만나 때문도, 홍해가 갈라진 사건 때문도 아니라 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하나님을 모실 ‘성막’을 짓기 위해 협력하면서 그들은 분명한 지향을 가진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들레 국수집에서는 성막 만들기의 기적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누군가가 염소고기를 보내오면 예기치도 않던 곳에서 대파와 부추와 오이가 답지하고,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국솥과 석유 버너 살 돈도 생기는 식이다. 그렇게 하여 마련된 염소탕은 선한 사람들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기에 성찬이 된다. 해마다 하는 김장도 기적의 연속이다. 너무 많이 들어와 김치를 보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서영남은 가장 좋은 김장김치 저장법을 발견했다. “바로 민들레 국수집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 김장을 할 수 없는 분들께 김치를 나눠드리면, 하느님께서 잘 보관해두셨다가 다음 해에 또 모자라지 않게 주실 것이다.”(233)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빌2:13)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서영남에게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꿈에 지핀 그를 통해 일어난 기적은 다음과 같다.

 

“2003년 4월 1일에 문을 연 뒤로 민들레 국수집은 선한 이웃들의 도움으로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 2003년 5월부터 느슨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민들레의 집’을 시작해 한 사람 한 사람 민들레 가족을 늘려가고 있고, 2008년 4월 1일부터는 ‘민들레 꿈 공부방’에서 어려운 가정형편의 아이들을 무상으로 돌보고 있다. 2009년 7월에는 ‘민들레 희망지원센터’를 열어 노숙인 손님들이 인간다운 삶을 맛보고 열망하며, 다시 한 번 멋지게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 2010년 2월 21에 문을 연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에서는 배곯고 소외된 어린이들이 없도록 무상으로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고 있으며,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교도소 형제들을 찾아보고 돌보는 일, 가난한 이웃들을 보살피고 돕는 일도 열심히 하고 있다.”(222)

 

하나님이 서영남을 통해 꿈을 꾸고 계시니, 그 꿈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되지 않는가? 서영남은 우리에게 꿈꾸는 법을 아니 꿈대로 사는 법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 서영남은 추천자인 박기호 신부의 말대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성자(聖者)’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생에 짓눌린 채 가쁜 숨을 쉬며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래도 그는 아무런 판단의 말도 하지 않은 채 환한 미소로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 시선 어딘가에 노숙인 예수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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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22 07:01)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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