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허물없는 세상의 꿈 2010년 05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허물없는 세상의 꿈

 

얼마 전, 살고 있는 아파트의 1층 출입문 교체 작업이 벌어졌다. 출입구에 보안성이 강화된 자동문을 설치하면 경비인력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면서 실시한 일이다. 늘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덕담도 건네곤 하던 경비 아저씨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말벗이 되기도 하고, 주민들의 무거운 짐도 옮겨주고, 일렬 주차된 차를 밀어주기도 하던 후덕한 이웃 한 사람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분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새삼 면구스러워진다. 최근에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출입 차량을 통제하는 초소도 생겼다. 내 집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그런 관문은 결국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낯가림이 심한 편인 나는 공동주택으로 이사한 이들을 방문할 때마다 왠지 모를 불편함에 시달리곤 한다. 낯선 이들에게 보내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자체가 장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집에는 초대를 받아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사람이 싫은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관문 앞에 서기가 싫은 것이다.

 

리 호이나키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오늘날 권력과 부와 상상력과 지성과 문화생활을 조직하고 독점하려는 기관들은 세 종류의 분리 혹은 고립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그 기관들은 “사람을 그 육체와 장소와 시(詩)로부터 떼어놓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육체의 연장(延長)이라 할 수 있는 도구 생활자인 우리는 몸으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근대적 지각과 운동양식에 갇혀 있을수록 직접적 감각체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마련이다. 또 우리 몸이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 곧 장소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도시에서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유목적이라 할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사람들은 늘 자기 삶의 자리를 벗어나곤 한다. 도시의 삶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서 그 장소가 갖고 있는 이야기와 기억들과 접촉을 유지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풍요로움 속에서도 내면이 빈곤한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근대적 삶은 우리에게서 시를 빼앗아 가고 있다. 우리가 정신적 어둠 속을 방황하는 것은 시인들이 언어의 올가미로 낚아챈 영원의 순간에 우리 삶을 비춰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기상 관측 이래 가장 춥다는 4월 말을 보내면서 마음조차 스산하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공사 소음을 견디다 못해 피난처처럼 찾아간 곳이 서울역사박물관이다. 그곳에서 <골목 안, 넓은 세상: 김기찬 사진> 특별전을 보았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라져간 서울의 골목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지난 시절의 남루한 뒷골목 풍경은 낯설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나의 세계였다. 구불구불 비좁은 골목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골목에 깔아놓은 허름한 자리에 배를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하는 아이, 무더운 여름날 골목에 내놓은 함지 옆에 엎드려 엄마가 끼얹어주는 찬 물에 몸을 오소소 떠는 아이, 양은솥 한 가득 비빔밥을 썩썩 비벼 나눠먹는 사람들, 감자 껍질을 벗기며 힐끔힐끔 골목 어귀를 살피는 여인, 주인들이 두고 있는 바둑판을 골똘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견공, 나른한 햇살을 받아 까무룩 잠이 든 할아버지와 나도 고단하다는 듯이 설핏 잠에 빠진 어미 개. 아, 우리가 두고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곳은 누군가의 표현대로 따뜻한 온정과 사랑이 넘치던, 가장 자유롭고 허물없는 세상이었다.

 

누추하지만 각박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얼굴빛 환하고, 삶이 고달파도 어울릴 줄 알았던 그 세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마음의 장벽을 자꾸만 높이며 살아가는 부박하고 희떠운 삶은 결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세상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대체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것인가?’ 묻고 또 묻게 되는 나날이다.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1 01-22 04:01)
목사님 감사합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