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힘내라, 강물아 2010년 04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힘내라, 강물아

최병성의 <<강은 살아 있다>>

최병성 목사가 하는 말 한 마디도, 글 한 줄도 책상머리에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최 목사는 언제나 생명들과 호흡하고 생명들이 아파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 생명들이 외치는 소리를 인간에게 전하는 이 시대의 귀한 예언자요, 메신저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문규현 신부

 

 

불도저 세상에 맞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민물고기 백 가지>>를 쓴 최기철 박사는 “우리 민물고기 30종 이상을 알고 있는 유망한 사람인가, 열 종밖에 모르는 평범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열 종도 모르는 불행한 사람인가”라는 말로 머리말을 열고 있다. 불시에 쪽지 시험을 보게 된 수험생처럼 아는 민물고기 이름을 꼽아보았다. 피라미, 붕어, 버들치, 미꾸리, 모래무지, 누치, 어름치, 쉬리, 송사리, 꺽지, 퉁가리, 은어, 메기, 쏘가리, 빙어, 송어…아, 그래도 불행한 사람은 면했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기철 박사는 이어 이렇게 반문한다. “어린 시절에 냇가에서 미역을 감아 보지 못한 사람, 물장구치거나 자맥질을 해 보지 못한 사람, 모래밭과 자갈밭과 풀밭을 달려 보지 못한 사람, 새소리 물소리 벌레소리를 들으며 숲길을 걸어 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건전한 정서를 지닌 한 사람으로 자랄 수가 있을까?” 이 질문을 통해 최박사는 그럴 수 없다는 강한 심증을 드러내고 있다. 영어 단어를 모르면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가 나고 자란 땅에 살고 있는 식물과 동물에 대해 무지한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태이다.

 

현대의 도시 공간은 균질화를 그 특색으로 한다. 이 나라의 어느 도시를 가보아도 도시는 특색이 없다. 균질적인 공간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양한 사고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는 여기에 어울리는 표상은 불도저라고 말한다. 사정없이 넘어뜨리고 깎아내고 밀어내고 고르게 하는 불도저. 그것은 효율적이지만 땅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뭇 식생들에게는 폭력 그 자체이다. 추진력이 강한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불도저라고 부른다. 불도저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언제 어느 때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무너뜨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렇다 해도 강까지도 균질화된 공간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꿈과 아련한 기억이 흐르는 강,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강, 굽이굽이 흘러가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던 강의 흐름을 차단하고, 마치 차압 딱지를 붙이듯 강을 식민화하려는 불도저들을 어찌 해야 하나?

 

오래 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보면서 잔잔한 강물이 던져주는 평화로움을 맛보며 살고 싶다는 원의를 품었던 최병성 목사는 그의 꿈대로 강원도 영월의 서강가에 깃들어 사는 홍복을 누렸다. 그는 아침마다 카메라를 들고 마치 순례하듯 강가를 거닐며 영롱한 이슬방울에 맺힌 삼라만상의 신비를 찍었고, 생태교육가로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생태적 감수성을 일깨우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그를 그곳에 데려다 놓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서강 유역에 쓰레기 매립장을 세우고, 동강에 댐을 건설한다는 정부 계획이 발표되자 그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창조주가 솜씨를 다해 빚어놓은 강을 훼손하는 일을 앞장서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꺽지와 쉬리, 돌고기, 누치, 쏘가리 그리고 물떼새들의 신음소리가 그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태계 벗들의 대리인이 되어 그런 파괴에 맞서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산업 폐기물을 이용해서 만드는 쓰레기 시멘트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그 실태를 고발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수경 스님의 말대로 멧새와 들꽃과 물고기를 통해 영성을 벼리는 수도자이기에 물방울의 아름다움에만 눈길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강을 살린다고?

그런 그가 정부가 마치 속도전처럼 해치우려고 하는 소위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는 책을 냈다. <<강은 살아 있다>>는 아름다움 너머의 참됨을 추구하는 그의 눌함(訥喊)이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진실을 알아야 거짓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저자는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물 확보, 수질개선, 홍수방지, 지역균형발전, 주민과 함께 하는 복합 공간 마련 등의 명분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정부는 뭔가 미심쩍어하는 국민들 앞에 선진국이 시행했던 강 살리기 사업을 예로 든다. 준설과 토목 공사를 통해 죽었던 강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이 시행했던 강 살리기와 4대강 사업이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면서 저자는 독일의 이자강과 스위스의 투어강을 예로 든다. 19세기에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홍수 예방을 위해 인공 호안을 만들고 제방을 건설하면서 수로로 정비되었던 강들이 오히려 대홍수를 조장하고 지하수를 고갈시킨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독일과 스위스는 막대한 시간과 예산을 들여 그 강들을 자연 하천으로 복원했다. 수로에 물만 가득하던 강에 여울과 모래섬이 복원되면서 생물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기적도 나타났다. 미국의 에버글레이즈습지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쳤다.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살고 있던 그 광활한 습지에 수로와 제방을 쌓고 강을 직강화하자 수많은 동식물이 사라지고 가까운 바다에는 적조 피해가 나타났고, 플로리다 주정부와 연방정부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던 수로와 제방을 없애기로 작정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다(22-26).

 

정부는 국민들의 다수가 이 사업에 반대하는 까닭을 홍보부족 때문이라며, 대형국책사업은 국민들의 반대가 있더라도 소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들은 졸지에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고 자기 삶을 꾸려갈 능력도 없는 금치산자 취급을 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살리기’를 청계천 복원 공사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비기면서 다수의 국민들이 반대해도 공사가 완료되면 국민들도 다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대단한 치적으로 내세우는 청계천 복원은 성공적이었나? 콘크리트로 처바른 하천 바닥에는 녹색 부착조류가 뒤덮이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연간 수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 형편이다. 서울 시장 시절 임기 내에 공사를 마치기 위해 서두른 탓에 조선 왕조 수백 년의 역사가 담겨 있는 소중한 문화재급 유물들은 훼손되거나 망실되고 말았다. 문화란 시간의 온축이고, 한번 망가지면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물이 흐르고 시민들이 그 물가를 걷는다고 하여 청계천 복원사업을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중랑구 하수종말처리장에 방치된 청계천의 문화재는 모진 세대를 만나 기억의 뒤안길로 스러져가고 있다.

 

무엇이 더 시급한 일인가?

정부는 또 22조원이 투입되는 4대강 사업으로 34만 개나 되는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래를 준설하고, 보를 설치하고, 제방을 보강하고, 댐을 건설하고, 농업용 저수지 둑을 높이는 등의 일은 대부분 인력이 필요 없는 단순 토목공사에 불과하다. 한국은행이 5년마다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우리나라 산업 연관표의 통계(57쪽)를 참조할 때 토목건설업의 취업 계수는 제조업과 금융업을 빼고는 거의 밑바닥 수준이다. 미래지향적이고 지속적인 일자리를 만드는 게 정부의 일이라면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4대강 사업은 정반대의 길로 국민들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또한 22조원의 예산이 투입되기에 지역 경제가 활성화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와 다르다. 저자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오히려 블랙홀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4대강 사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의 숙원 사업들은 축소되거나 취소되고 있다. 도로와 철도 항만 등 사회간접가본 예산도 삭감되고 있고, 결식아동 급식 지원금, 저소득층 에너지 보조금, 사회적 일자리 창출 지원금, 노인 일자리 예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예산, 한시적 생계 구호비, 실직가정 대부(貸付) 사업비, 저소득층 의료 지원비, 저소득층 긴급 복지비, 장애 아동 무상 보육 지원금, 장애인 차량 지원비 등 서민 예산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65-66쪽)이다. 4대강 예산은 저소득층의 고혈이다. 정부는 유람선이 선유하는 강의 청사진을 차단막처럼 침으로써 사람들이 이 사업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 이 사업이 22조원 규모로 완결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4대강 준설로 다리의 안전성에 문제가 발생하는 교량을 보강해야 하고, 강 양안에 매립된 도시가스관도 이전해야 하고, 취수장도 이전하거나 개보수해야 하고, 준설토 적치장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도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정부는 많은 부분 수자원공사에게 공사비를 떠넘기고는 그 대가로 4대강 하천 구역 경계에서 양안 2km 이내 지역에 주거, 관광, 레저 시설 등을 조성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사업 시행자로 수자원공사를 지정했다. 난개발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 부족 국가?

정부는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이기 때문에 미래의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4대강을 준설하고 보를 세워 물 그릇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대한민국은 정부가 말하듯 ‘물 부족 국가’인가? 저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한다. 정부가 주장하는 물 부족 국가의 유일한 근거는 미국의 민간단체 국제인구행동연구소(PAI)가 정한 기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물 관련 최상위 법령인 [수자원장기종합계획(2006-2020) 보고서]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물 부족 국가가 아니다”라고 못 박고 있다. 가뭄이 들면 물 부족으로 고생하는 지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은 수도 시설이 되지 않은 면 단위 이하의 산간․도서 지역이다. 물이 부족한 지역은 4대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대강 사업은 물 부족의 해결책도 아니다. “환경부의 <상수도 통계> 자료 중 ‘국가별 1인당 물 사용량’을 보면, 대한민국은 이탈리아와 함께 전 세계에서 최고의 물 낭비국가에 속”(83쪽)한다. 물 그릇을 키우기보다는 물을 절약하며 살 수 있는 문화와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훨씬 생태적이다. 저자가 4대강 사업은 4대강에 배를 띄우기 위한 수량 확보 전략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저자는 홍수 예방을 위해서라도 4대강 사업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발표가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집중 호우로 말미암아 피해를 본 지역과 4대강 본류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국토해양부의 자료는 4대강을 포함한 국가하천의 97.3% 이상에서 홍수 피해 대책이 완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폭우 피해가 집중된 곳은 지천이었고, 도로 건설에 따른 산사태와 난개발에 따른 도심 저지대의 침수 등이 피해 규모를 키웠다. 손대야 할 지방하천과 소하천 등은 놔두고 문제가 없는 본류의 하상을 준설하겠다고 나서는 까닭은 무엇일까? 정부는 지금 낙동강에 모래가 쌓여 홍수가 난다며 강 전체를 준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감사원은 그동안 과도한 준설로 낙동강 하상이 낮아졌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99).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2004년과 2005년 서울지방국토환경관리청이 ‘남한강 홍수 예방을 위한 하도 준설 사업’을 신청하자 환경부는 준설 신청 서류를 반려했다. 환경부가 준설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생태계 파괴와 식수 오염 때문이었다. 준설은 수생생물의 서식과 산란 장소를 파괴하여 생태계의 서식 환경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생물들이 맡고 있던 자정․정화 기능이 저하되고, 부유물에 따른 수질 악화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물이 위험하다

4대강 준설이 가져올 가장 직접적인 피해는 식수 대란이다. 환경부는 “한 여름 홍수 때 흙탕물이 일어나도 식수대란이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수중 준설로 탁수가 발생할지라도 식수 공급에 아무 문제가 없다”(112)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에 대한 호도일 뿐이다. 집중호우로 발생하는 흙탕물은 입자가 무거워 침전 속도가 빠르지만, 준설로 인해 발생하는 부유물은 입자가 가벼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침전되지 않는다. 탁수에 포함된 박테리아, 조류, 유기화합물, 산화된 중금속 등은 오탁 방지막과 침사지로는 차단할 수 없다. 부산, 경남 지역의 취수원을 사천시에 있는 남강댐으로 옮기려는 것을 보면 정부도 이미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오니층을 채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식수 대란을 염려하는 이들에게 정부가 내놓는 대답은 수질을 개선하는 우리 기술이 세계적이라는 말 뿐이다. 시화호 살리기를 근거로 들지만, 죽었던 시화호가 살아난 것은 첨단 기술 덕분이 아니라 해수를 유통시켰기 때문이다. 대통령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서 보를 막은 4대강에 수질을 감시하는 로봇을 풀어 중앙통제실에 보고하게 함으로써 물이 썩지 않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한편의 코미디였다.

 

4대강 사업에는 16개의 대형 보(洑) 설치가 포함되어 있다. 시민 단체가 보 세우기를 운하를 위한 정지작업이라 지적하자, 정부는 홍수 예방과 물 그릇 확대 등의 이유를 들어 그것을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집중호우의 빈도가 높아가는 상황에서 더 큰 재해를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는 가동보로 만들면 된다고 말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하자, 정부는 보를 만드는 것이 수질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슬그머니 비껴서고 있다. 대통령은 그 근거로 한강에 보를 설치하자 수질이 개선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지의 탓이거나 거짓이다. 한강 수질이 나아진 것은 보를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천에서 유입되는 오염원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도시가 확대되고, 자동차 수가 증거하고, 축산 분뇨가 흘러드는 상황에서 보를 세우면 물이 썩는 것은 당연하다. 수질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강물이 흐르는 속도인데, 보 설치는 국무총리가 말했듯이 강을 큰 어항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린 워시

정부는 4대강 사업을 녹색 성장으로 포장하기 위해 4대강을 따라 1700km에 이르는 자전거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전형적인 그린 워시(green wash)이다. 물별이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저자가 분노하는 것은 자전거도로 건설이 오히려 생태계 파괴에 기초하고 있고, 더 나아가 고탄소 환경 파괴 사업이라는 데 있다. 자전거도로를 만들기 위해 굽이굽이 감돌아 흐르는 강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산허리를 무참하게 잘라내고는, 경사를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고 있다. 상수원 보호 구역이든, 생태와 역사․문화․경관 보전 지구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숲과 강의 경계가 인위적으로 차단되면서 생태계가 단절되고, 산사태의 위험도 커가고 있다. 게다가 자전거도로 건설에 사용되는 시멘트는 철강 사업 다음으로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이 아니던가.

 

4대강 공사 현장은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의 보물 창고이다. 유구한 세월 동안 강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온 이들의 삶의 흔적이 가뭇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정부는 공사 구간 양안을 합쳐 1200km가 넘는 이 구간의 지표 조사를 한 달 반 만에 끝냈다. 가히 초스피드라 아니 할 수 없다. 이것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심각한 약탈행위가 아닌가. 준설한 사토로 강변의 농경지를 성토하고 나면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수많은 문화재와 삶의 흔적들은 망각의 강으로 흘러들 것이다. 아니, 흘러들 강조차 없으니 매장되거나 수장되고 말 것이다.

 

강은 인간에게 속한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유대인들은 땅은 하나님께 속한다고 말한다. 강도 마찬가지이다. 강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만 주신 것이 아니라, 뭇 생명을 품어안고 기르라는 창조주의 명령을 수행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4대강 사업은 창조주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하는 ‘생명의 관점’이 아니라 경제 곧 돈이라는 ‘탐심의 산물’(207쪽)이다. 강을 준설하여 수심이 깊어지고, 보를 건설하여 물이 흐를 수 없게 되면 토종 어류들은 산란할 장소를 얻지 못할 것이고, 얕은 물가에서 머리만 물속에 처박고 수초뿌리나 갯지렁이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던 철새들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다양성이 파괴되면 강은 죽음의 강이 된다. 강의 건강은 수량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울과 소가 반복되며 굽이굽이 흘러 생명을 낳고 기르던 강, 문화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던 강이 이제 사망선고를 받고 있다. 인위적으로 흐름을 차단당한 채 생명들과의 일차적 접촉을 누릴 수 없는 강은 이제 더 이상 고요한 사색으로 우리를 초대할 수도 없고 생명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도 못한다. 물은 화학기호로 H₂O이지만, 흐르는 물은 H₂O로 설명될 수 없다. 인도인들에게 갠지스 강은 어머니이다. 그리스인들에게 레테는 이승의 신산스러움을 잊게 하는 망각의 강이다. 우리에게 강은 무엇인가?

 

저자는 4대강 사업이 실은 운하 사업임을 폭로했던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김이태 박사에게 애틋한 눈길을 보낸다. 그는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내부 폭로자라는 좁은 문을 택했다. 하지만 곡학아세하는 학자들이 더 많은 모양이다. 그들은 권력이 원하는 대로 연구결과를 내놓는 자동기계들인가?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책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거대한 댐 건설로 파괴되어 가는 생명들과 지역 공동체를 보면서 작가 생활을 접고 환경운동가로 변신했다. 최병성 목사도 그렇다. 부드럽고 따뜻한 눈길로 세계를 살피던 영성가 최병성은 이제 속절없이 죽임을 당하게 된 여린 생명들의 대변자가 되기로 작정했다.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알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꼭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염치와 부끄러움이 되살아나면 좋겠다. 책장을 덮는데 장자가 들려주는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하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다.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하였다. 날마다 한 구멍씩 뚫어주었는데 7일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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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23 10:01)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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