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사람을 아끼는 세상 2010년 04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사람을 아끼는 세상

 

서럽게 푸르른 날 아침이었다. 꽃은 향기롭고, 때를 만난 벌들은 붕붕거리며 아침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의례가 벌어지는 연병장까지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병사들의 장례가 있는 날이었다. 태극기에 덮인 관, 기도, 조총소리, 벌겋게 충혈된 눈, 거수경례. 격식을 갖춘 행진. 영정 속의 병사들은 물끄러미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담기지 않은 무덤덤한 눈길. 아름다운 대상 앞에서 가볍게 흔들렸을 그 미묘한 눈빛을 생각하며 하늘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흑’ 소리가 나더니, 이곳저곳에서 억눌렸던 오열이 터져 나왔다. 한 어머니가 앞으로 달려 나오더니 아들의 영정을 품에 안았다. ‘아이고, 내 새끼!’. 그 어머니는 아들의 영정을 업고 마치 어르듯 흔들어대며 말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업어 키웠는데. 아가, 이제 엄마가 너를 이제는 업어줄 수도 없구나.’ 그 기가 막힌 슬픔 앞에서 말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아주 오래 전 최전방 부대에서 군목으로 활동하며 겪었던 이 일화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침몰한 초계함 천안호의 실종자들 때문일 것이다. 천우신조를 바라는 가족들과 국민들의 마음은 예리하면서도 뭉특한 고통으로 인해 먹먹하다.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유대인들은 아기가 태어날 때가 되면 동네의 악사들이 몰려와 아기의 탄생을 경축하는 음악을 연주한다고 한다. 한 존재가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은 우주적인 사건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며 산다. 물론 그 이야기는 다른 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우주의 중심이다. 그의 생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이 인정 하든 하지 않든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실종자들의 사연에 눈시울을 붉히지 않는 이가 없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익명의 저편에 있는 남이 아니다. 사랑에 부풀고, 꿈에 들뜬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싶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다.

 

화가 난다. 왜 이런 일은 꼭 반복되는가? 성숙한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되는 사회일 것이다. 돈이 없고, 힘이 없고, 학벌이 보잘 것 없다고 하여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 말이다. 나라의 격이 높아진다는 것은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국제회의를 유치할만한 능력이 커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아끼는 능력이 커가는 것이 아니던가?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애태우며 들판을 헤매는 목자의 이야기나,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놓고 온 집안을 뒤지는 여인의 이야기도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생명을 낭비하는 사회에 희망은 없다. 종교는 욕망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우리 사회의 흐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부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영혼들은 폭포의 굉음을 듣지 못한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아낄 수 있는 사회라야 구성원 모두를 아낄 수 있다. 유대교 철학자의 말이 천둥처럼 들려온다. “만일 적들이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의 가장 큰 어둠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다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희생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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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25 10:01)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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