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문명의 정상성을 뒤집는 복음 2010년 03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문명의 정상성을 뒤집는 복음

-마커스 J.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의 <<첫 번째 바울의 복음>>

 

“크리스천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된 주님을 따른다는 뜻이었으며, 제국의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되는 생활방식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126)

“로마의 제국신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조용하고 질서가 잡힐 때 지상에 평화가 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독교신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정의로울 때 지상에 평화가 온다고 말했다.”(165)

 

바울의 세 얼굴

10여 년 전 로마 근교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에서 느꼈던 고적함이 떠오른다. 바울이 참수당한 곳으로 알려진 그곳에 세워진 예배당은 ‘세 개의 샘’(Tre Fontane)이라는 낯선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었는데, 그것은 잘린 바울의 목이 땅에서 세 번 튀어올랐고 그 자리에서 샘이 솟아났다는 전설 덕분이었다. 컴컴한 예배당 한 구석에서는 과연 물이 졸졸 솟아나오고 있었다. 볼 수는 있지만 마실 수는 없는 그 샘물은 누구의 가슴으로 흘러갔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예배당 저편에서 하얀 수건을 든 노 수녀 한 분이 장의자들을 마치 어루만지듯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고요함은 기도였고,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회심 이야기치고 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없지만 바울의 경우는 단연 최고이다. 살기등등한 적개심, 빛, 소리, 눈멂…. 박해자에서 박해받는 자로의 극적인 전환은 압도적이다. 예수의 사도가 되어 그가 온 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온갖 시련(고후11:23-27)은 우리의 나른한 일상을 깨우는 쇠망치이다. 그런 바울을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의 시선은 고르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바울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유대교의 한 종파로 전락할 위기에 있었던 기독교를 구한 인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바울을 기독교를 망친 인물로 보기도 한다. 갈릴리 사람 예수의 소박하고 역동적인 가르침을 지성화하고 교리화함으로써 생명력을 잃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은 노예제도와 반유대주의를 용인하거나 부추기고, 권력자들의 지배를 합법화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고, 동성애를 단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했지만 바울이었다면 그 여인은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게 그의 견해이다. 정말 그러한가? 하지만 성경을 통해 보면 바울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다. 보수적인 바울이 있는가 하면 급진적인 바울도 있다. 어느 것이 진짜 바울인가?

 

저명한 종교학자이자 신약성서학자인 마커스 J.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함께 쓴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진짜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탐색하는 일에 착수한다.

 

“우리의 공통적인 희망은 바울을 종교개혁의 세계로부터 구출하여 본래의 로마 세계 속에 자리매김 함으로써, 바울을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이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으로 볼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계약전통(covenant tradition)과 로마의 제국신학(imperial theology)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으로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것이다.”(15-16)

 

진짜 바울을 드러내기 위해 저자들은 세 가지 전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첫째, 신약성경 안에는 한 사람 이상의 바울이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27권 중에 바울에게 귀속되는 책은 13권이나 되지만 진짜 바울이 쓴 서신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등 7개뿐이다. 이 서신 속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는 매우 급진적이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의 메시지를 보수화해 계승한 후대의 책이고,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진짜 바울의 메시지를 철저히 뒤집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급진적인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이 공존하고 있다. 둘째, 바울의 진짜 편지들도 역사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속한 삶의 자리는 로마제국이 유포하고 있던 제국신학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던 시대였다. 바울은 제국신학에 맞서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셋째, 바울의 메시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전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저자들은 바울을 “유대인 그리스도 신비주의자”(a Jewish Christ mystic)라고 명명한다.

 

급진적 바울에게 씌워진 재갈

저자들은 바울의 메시지의 급진성을 입증하기 위해 빌레몬서를 정밀하게 분석한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자기에게로 피신해 있던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들려보낸 편지이다. 이 서신은 매우 짧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가 혁명적이고, 또 신앙인으로서의 바울의 입장이 오롯이 담겨 있기에 주목해야 할 서신이다. 저자들은 도망 노비인 오네시모가 옥중에 있던 바울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로마법의 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법은 노예가 신전을 피난처로 삼는 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친구에게 도망쳐서 중재와 자비를 구하는 것도 허락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와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바울의 급진성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종이 아닌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한다. 복음이 가르치는 해방의 평등성은 영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이 바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더불어 행위'(faith-with-works)에 입각해 처신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요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바울의 급진적인 메시지는 보수화되기 시작한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크리스천 주인과 노예 사이에 지켜야 할 상호윤리를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주인과 노예라는 그들의 관계가 있는 그대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디도서에 이르면 상호윤리조차 실종되고 오로지 종들이 주인에게 즐겁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급진적 바울이 이렇게 보수화 과정을 거쳐 반동적인 형태로 타락해가는 것은 비단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바울은 가족 관계와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평등성과 사도 직분에서의 평등성을 강조하지만, 이런 그의 급진적 요구는 세월과 더불어 퇴색되고 보수화를 거쳐 반동화의 운명을 맞고 만다. 한 가지 단적인 예가 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동역자 27명의 이름을 그리움으로 호명한다. 남자가 17명이었고 여자는 10명이었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그 가운데 유니아를 남자로 둔갑시켰다. 유니아가 유니아누스라는 남자 이름을 축약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유니아를 남자로 둔갑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사도들 중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여자의 사도직을 부정할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로마가 닦은 길을 거슬러

바울이 이렇게도 급진적인 견해를 갖게 된 것은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또 다른 요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들은 바울이 태어나고 자란 길리기아 지방의 주도인 다소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한다. 다소의 북쪽으로는 타우루스 산맥이 가로놓여 있었고 남쪽으로는 따뜻한 지중해의 해안이 전개되고 있었다. 다소는 그러니까 해로와 육로의 교차점이면서 그리스 세계와 셈족 세계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고향 다소는 그에게 만성 말라리아라는 반갑지 않은 선물을 주었지만, 자연과 싸우며 삶의 터전을 가꾸어가는 검질긴 삶의 모습을 그에게 각인시켜 주었고 국제화된 교육을 받을 기회도 제공해주었다. 유대 전통은 물론이고 그리스 철학, 수사학, 변증론, 논쟁술을 익힐 수 있었기에 그는 준비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었다.

 

열성적인 바리새파 유대인이었던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물론 다마스쿠스 체험이다. 박해자였던 그가 박해받는 자로 삶을 급격히 전환한 것은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당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즉시 사도적 소명에 헌신했지만 그의 초기 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나바테아 선교는 갈릴리의 영주인 헤롯 안티파스와 나바테아 왕 아레사 4세의 갈등과 전쟁의 와중에 무산되고,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시작한 키프로스와 갈라디아 선교는 다소의 성과가 있었다. 안디옥 사건 이후 독자적인 선교의 길에 나선 바울은 지중해 세계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간다. 그는 반제국주의적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동에서 서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의 도시 노동자들의 현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도시는 가난과 질병과 적개심으로 인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약고와 다를 바 없었던 도시에서 바울이 타깃으로 삼은 이들은 누구였을까? 저자들은 이 대목에서 매우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바울이 각 도시에 있는 회당을 찾은 것은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당 예배에 참석은 하면서도 개종은 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 유일신론을 받아들여, 유대인의 도덕, 가족 윤리, 공동체의 가치를 존경하고, 특히 정기적으로 회당에 출석했던 사람들”(120)이었는데, 바울은 그들을 철저한 헌신의 자리로 이끌려 했다. 바울이 두 세계 사이의 완충역할을 해주었던 유력한 이방인들을 빼앗긴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대인들의 위험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로마의 지배세력이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늘의 독백이 아니라, 땅의 현실에 대한 부정이요 초극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주'로 섬기는가?

하나님의 아들, 성육하신 하나님, 주님, 해방자, 세상의 구원자라는 호칭은 거의 즉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1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이 호칭들은 예수가 아닌 다른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로마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침으로 제국을 통일한 그에게 원로원은 '위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그는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를 중심으로 해서 제국 신학이 형성되었다. 제국 신학의 기본 구조는 종교→ 전쟁 → 승리 → 평화이다. 세상의 평화라는 역사의 목표는 신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쟁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국 신학은 여러 가지 문서들과 비문들, 동전들과 형상들, 동상들과 신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44). 제국 신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승리를 통한 평화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며, 국가들의 운명이며, 문명의 정상적인 모습이며, 하늘의 뜻이라고”(146) 믿었다.

 

이러한 시대에 황제에게나 적용되던 호칭을 로마 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제국의 신학과 체제에 도전하는 매우 중대한 도발이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사실 자체가 반체제적 행동이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평화를 거둘 수 있다는 제국 신학을 해체하고 새로운 평화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정의를 통한 평화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곧 처벌이 아니라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이다. 진정한 평화는 구성원 모두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공평하게 나누어 질 때 찾아온다. 바울이 제시하는 십자가 신학의 기본 구조는 종교→ 비폭력→ 정의→ 평화이다.

 

참여하는 종말론

이 책에서 저자들이 가장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Christ crucified)의 죽음이 갖는 구원사적 의미이다. 저자들은 매우 급진적인 명제를 내놓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보는 것은 틀린(bad) 역사이며, 해로운(bad) 인간론이며, 불량한(bad) 신학”(175)이라는 것이다. 절대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진술 앞에 당황하거나 불쾌하게 느낄 것이다. 대속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토대라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우리가 기대고 있는 대속론이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1097년에 쓴 책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논증은 4단계를 거친다.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2)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변상 없이는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 3)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 진 빚은 유한한 인간이 갚을 수 없다. 4) 그래서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의 속죄적 죽음이 필요하다. 법정 용어로 설명된 대속 교리는 이렇게 탄생했지만, 이런 대속론은 예수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의미를 왜곡하기 쉽다. 본래 대속 혹은 속죄(atonement)는 화해 곧 ‘하나됨’(at-one-ment)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됨을 가져오는가?

 

저자들은 먼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로마제국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이들은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저항자들이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오랜 시간 고통을 겪게 하는 십자가 처형을 통해 제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각인시킴으로써 제국에 도전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하는 것(the nomalcy of this world)”(183)에 도전하는 것, 즉 소수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물, ‘지혜’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사회체제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일이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옛 정체성과 생활방식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정체성과 역동적 변화의 길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들은 예수는 우리가 치러야 할 죄 값의 대체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은 그 시대의 정신 곧 지배와 불의와 폭력의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따라서 부활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들은 이를 일러 ‘참여하는 종말론’(participatory eschatology)이라 한다.

 

분배적 정의가 실현된 세상을 위하여

이렇게 본다면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천당에 가는가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대로 죄 많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역동적 가르침이다. 저자들은 로마서가 "갈라진 세상을 치유하며, 폭력에 근거한 불의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세상을 종식시키며, 서로 화합하며 평화로운 세상(a unified and peaceful earth)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열정에 관심을 쏟고 있다"(215)면서 로마서에 주목한다. 로마서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이방인과 유대인, 유대인과 크리스천, 크리스천 유대인과 크리스천 이방인들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 것인가 인데, 바울이 이들을 하나로 꿰는 실로 제시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보복적 정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분배적 정의'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이들 속에 성령을 이식함으로써 그들을 정의의 도구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를 경험한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을 분배적 정의가 실현된 곳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 여기에 있다.

크리스천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이 세상의 정상적인 사회들 안에서의 생활방식과는 철저하게 다른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방식을 줄여서 부르는 말"(253)이다. 초대교회는 제국 신학이 당연시하고 있던 사회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돌봄과 나눔에 기초한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함으로써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은사는 물론 사랑이었고, 그 사랑의 사회적 표현은 분배적 정의와 비폭력, 빵과 평화였다.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첫 번째 바울은 침묵당했다. 문명의 정상성을 해체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의 역동성을 이해하고 그 정신을 전하기 위해 생을 걸었던 위대한 사도가 오늘의 교회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책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이미 빼어난 연구 성과를 학계에 내놓은 두 학자가 왜 공동 작업이라는 지난한 작업을 선택했는가이다. 짐작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학문적 명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침묵당한 성경의 메시지를 드러내야 한다는 절박한 소명의식에 응답한 것이 아닐까? 번역자인 김준우 박사도 이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성경의 여러 번역본들을 대조해 보여주고, 또 독자로 하여금 대속 교리의 역사와 논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충실한 역주를 달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드러난 첫 번째 바울의 급진적인 메시지는 과연 경청될 수 있을까? 체제 순응적으로 변해버린 교회,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교회는 이 책의 출간을 누구보다 경계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이 밝고 들을 귀가 있는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재확인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바울의 잘린 목에서 흘러나온 물은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1 01-25 10:01)
감사합니다 목사님.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