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성스러운 반역자들 2010년 03월 04일
작성자 김기석

성스러운 반역자들

 

비가 그치더니 생강나무 산수유나무 매화나무에 꽃망울이 부풋하게 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과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틈만 나면 마당가에 나가 새싹을 살피는 일이다. 누구보다 먼저 봄과 눈맞춤하고 싶다는 속 좁은 바람 때문일 터이다. 작을 ‘소’자 모양으로 돋아날 새싹이 외로울까봐 안달이냐는 아내의 꾸지람쯤은 건듯 미소로 퉁겨낼 수 있다. 아무러면 어떤가. 봄이 저 골목 어귀에 당도했다는데. 겨우 밑동만 남은 채 겨울을 난 씨도리배추에 노란 장다리꽃 피어날 날을 난 눈물겹게 기다린다. 묵직한 겨울 점퍼를 벗어던질 때쯤이면 언제나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성자 프란체스코>의 음성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한겨울에 아몬드나무에 꽃이 만발하자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비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슨 허영이람’ 하고 흉을 봤다. ‘저렇게 교만할 수가! 생각해 봐, 저 나무는 저렇게 해서 자기가 봄이 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 아몬드나무 꽃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용서하세요, 자매님들, 맹세코 나는 꽃을 피우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내 가슴속에서 따뜻한 봄바람을 느꼈어요.’

 

가슴에서 봄바람을 느끼면 어쩔 수 없다. 봄의 사람이 되는 수밖에. 출퇴근길에 통과하게 되는 대학거리가 요 며칠 활기차다. 고등학생 티가 여전히 묻어나는 새내기들의 씩씩한 걸음걸이 때문인지 거리가 온통 술렁이는 것 같다. 시간의 볼모로 살아온 지난 몇 해의 기억은 아예 사라진 것일까? 아직 권태의 침입을 받지 않은 눈길엔 호기심이 가득하고, 생기발랄한 웃음소리는 종소리 같다. 두툼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자랑스레 걷는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는 이의 설렘이 있다. 그 문이 부디 희망의 문이기를. 저절로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희망을 향해 걸어가는 저들에게 오랜 행군을 견디어 낼 발을 허락해달라고, 어떤 시련이 와도 정복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저들의 마음마다 세워지게 해달라고, 현실 논리에 자발적으로 투항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살아있는 생명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비극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개성 죽이기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로부터 오직 그만이 줄 수 있는 찬란한 선물을 품부 받아 이 세상에 온다. 그러나 제도의 틀에 갇히는 순간 그 선물은 무채색으로 변하고 만다. 김승희는 ‘제도’라는 시에서 색칠공부 책을 칠하는 아이를 등장시킨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그런데 아이는 자기 색칠이 금 밖으로 나갈까봐 두려워한다. 온순하고 상냥한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책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을 한다. 그래서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선 안에 갇혀 있다. 엄마는 금을 뭉개버리라고, 선 밖으로 북북 칠하라고 말하고 싶다. 자유는 ‘위반하는’ 데서 얻을 수 있음을 알지만 엄마이기에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엄마는 제도이고 총독부이다. 어느 순간 시인은 절규하듯 외친다. 발랄하게. “엄마를 죽여라! 랄라!”

 

이 생기 충만한 봄,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들사람을 만나고 싶다. 스스로 자기 삶의 입법자가 되어 새로운 생의 문법을 만들어가는 사람, 전사가 되어 낡은 가치를 사정없이 물어뜯고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기꺼이 끌어안는 성스러운 반역자들. 새로운 세상은 그들을 통해 도래한다.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이는 그 길을 일러 십자가의 길이라 했다. 길은 열렸건만 그 길을 걷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욕망에 부푼 가슴들이 자아내는 악취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세상을 원망하지는 말 일이다. 원망은 약자의 버릇이라지 않던가. 겨울 칼바람 속에서 피어날 날을 기다리며 안으로 향기를 머금은 저 나무처럼 살 일이다. 삶의 향기 그윽하게 머금은 봄의 사람들이여, 이제 깨어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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