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기도의 강에 뛰어들라 2010년 03월 04일
작성자 김기석

기도의 강에 뛰어들라

-로버트 벤슨의 <중단 없는 기도>

 

기도는 숨 쉬기와 같다. ‘불안’을 숙명처럼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바람과 성취 사이에서 흔들린다. 삶이란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사이의 줄타기이다. 심연을 본 것은 저 아스라한 411m 높이의 쌍둥이 빌딩 사이에 로프를 걸고 그 위를 걸었던 필리페 페티만이 아니다. 삶 자체가 심연 위에 세워진 것 아닌가? 지진으로 무너진 집의 잔해 앞에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는 이재민의 시선도 기도이고,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논과 밭을 보며 농부도 담배만 빨아대는 농부들의 흔들리는 시선도 기도이다. 자리에 누워도 쑤시는 삭신을 달랠 길 없어 끙끙 앓는 막일꾼의 신음소리도 기도이다. 저마다 좋은 날이 열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기도도 있다. 우리가 기도라 하는 것은 대개 이 범주에 속한다. 기도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영원의 리듬에 조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기도는 훈련을 필요로 한다. ‘영성의 보화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출간된 로버트 벤슨의 <중단 없는 기도>는 개신교 전통에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성무일도(聖務日禱, daily office)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나이 마흔에 성무일도와 만난 후 15년 간 계속해온 기도생활의 여정이 조촐하고 평이하게 담겨 있다. 신학자도 성직자도 아닌 저자가 이런 책을 쓰게 된 것은 자기가 발견한 보화를 나누고자 하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나는 기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 즉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배우고 싶은 신앙의 순례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성무일도란 낮과 밤의 모든 일과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하루 중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하나님께 드리는 규칙적인 기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시간은 대개 초대송, 시편기도, 시작기도, 찬미가, 오늘의 시편, 성서읽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응답, 성도들의 기도, 마침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수영을 하는 이들이 규칙적으로 고개를 들어 숨을 쉬듯이 성무일도는 일상의 흐름을 끊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비끌어 매는 전례이다. 시간의 매듭이 없다면 우리는 먹고 마시고 일하고 싸우고 노는 일상의 흐름 속에서 영원을 관조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성무일도를 힘들게 여긴다. 분주한 일상을 보내면서 시간을 특정해 기도에 바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성무일도는 복잡하다는 편견도 성무일도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기도를 문제에 대한 해결 혹은 효능으로 생각하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성무일도는 매력적이지 않다. 성무일도는 우리를 화려한 신비체험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과 깊고도 친밀한 사귐을 갖고자 하는 이들은 성무일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드린 기도와 예배 속에는 나 자신의 말보다 더 귀를 기울여야 하고 발견해야 할 무언가가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성무일도를 화단을 가꾸는 일에 빗대어 말한다. 그것은 끝이 없는 과정이다. 갈퀴질, 잡초 뽑기, 가지치기를 소홀히 해서는 장미꽃을 피울 수 없다. 이 기나긴 시간을 보낸 후에야 정원은 장미향으로 가득 차게 된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기도에 돌입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저자는 ‘작가가 되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것’이라는 말로 우회적으로 말한다. 모두가 새로운 삶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기도를 위해 시간을 내지 않는다. 절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혹은 타성이 그를 붙잡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단 시작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무심코 기도 시간을 빠뜨렸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고 말한다.

 

저자는 성무일도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미 기도가 생활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과 기도의 연대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달라도, 기도의 방법은 달라도 그들은 서로를 기도로 이끌어주는 멘토들이다.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된 날, 혹은 기도를 그만 두고 싶은 날, 신실하게 기도를 드리겠다고 약속했던 이들을 떠올리는 것이 기도 회복에 도움이 된다.

 

분주한 일상의 한복판에서도 우리는 성전을 세울 수 있다. 사하라에 매료된 시인 김수우는 베두인들의 단출한 삶을 통해 경건함을 배운다. “둥그렇게 바닥을 펴면 세상의 중심이 생긴다/네 개의 나무기둥을 세우면 지상의 축이 팽팽해진다/지붕을 펼쳐 얹으면 천막은 아침 신전이 된다”(<천막> 중에서). 아름답지 않은가?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들어 올리는 순간 우리 몸은 이미 신전이 되는 것이다.

 

성무일도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거대한 기도의 강에 합류하는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위대한 기도의 강을 형성한 사람들과 실존의 교감을 나누면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교회를 지탱해 온 것은 이름 없는 성도들이 드린 위대한 기도의 강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해 전 영국의 브리스톨 거리를 걷다가 어느 집 대문 앞에 “초대받았든 초대받지 않았든 하나님은 이곳에 계시다”라는 명패가 걸린 것을 보고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다. 수수한 차림의 집주인은 낯선 나그네를 기꺼이 환대해주었다. 마침 꽃이 좋은 때에 오셨다며 정원으로 안내하더니 쿠키와 차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는 재가 수녀였는데, 토마스 머튼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퍽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후 떠날 시간이 되어 안으로 들어가니 칠판에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작별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칠판에 적힌 스케줄 표는 그 때가 마침 오후 기도 시간이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수녀의 고요함, 관대함, 따뜻함, 개방적 태도는 오랜 기도를 통해 빚어진 하나님의 걸작이었다.

 

저자는 어려운 신학 용어 하나 사용하지 않으면서 성무일도를 드리는 의의, 성무일도를 실천하면서 경험한 여러 가지 난관과 보람과 유익을 잘 전달하고 있다. 사적인 경험에 대한 과잉 진술이 때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성무일도에 대한 입문서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홍수 중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교회마다 기도의 소리 넘치지만 기도가 존재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오늘의 상황에서 성무일도의 길로 우리를 안내하는 로버트 벤슨의 마음씀이 참 고맙다. 그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어쩌면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한국교회에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쉬지 않고 드려야 하는 기도, 그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라는 사명에 응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도의 몫을 충실히 감당할 때 거룩한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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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3-14 09:03)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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