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순례의 길 위에서 2010년 0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순례의 길 위에서

 

멋쩍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선 그는 말없이 서가만 둘러봤다. 시선을 마주치기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젖어 있었다.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 말없음표의 속말을 왜 짐작하지 못하겠는가? 그는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게 있더라며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간 어떤 인연에 대해 말했다. 멀어져가는 바람을 망연히 바라보며, 그 바람이 할퀴고 간 어지러운 흔적을 곱씹는 그의 표정에는 황혼 무렵의 비감함이 서려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만날 때마다 말의 무력함을 실감한다. 공감의 표정을 지으며 그저 귀를 기울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나를 찾아온 것도 어떤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진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의 쓸쓸한 고백이 끝나고 우리 사이에 깊은 침묵이 찾아들 무렵, 나는 주저리주저리 관계맺음의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내가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이라는 말도 한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미국의 교육지도자이며 사회운동가인 파커 파머로부터 배운 ‘신뢰의 서클’을 떠올렸다. 그는 현대인들이 공적인 역할의 세계와 감춰진 영혼의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분리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적인 사람일수록 영혼과의 접촉을 끊고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 속으로 숨어들기 일쑤이다. 하지만 참된 삶은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열린다. 파커 파머는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며 그것을 일러 ‘신뢰의 서클’이라 했다. 그 모임은 값싼 위로를 제공하지도 않고, 바로잡으려 들지도 않는다. 조용하게 그리고 존중하는 태도로 그의 영혼의 소리를 경청할 뿐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바로잡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때마다 상대방은 더욱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바로잡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순간 상대방은 굴욕감을 느끼게 되고, 그가 심리적인 참호 속으로 퇴각하는 순간 모든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그것은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런두런 관계맺음에 실패한 경험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씁쓸한 공감의 미소를 나눴다. 고통의 연대랄까?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어떤 끈이 생긴 듯한 느낌이었다.

 

그에게 내 마음이 스산해질 때마다 가만히 응시하곤 하던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성화상 <삼위일체>를 보여주었다. 형제살육이 벌어지고 타타르족이 러시아를 침입했던 15세기의 화가인 루블료프는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며 증오와 폭력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꿈을 담아 그 성화를 그렸다. <삼위일체>는 그러니까 그의 간절한 염원인 셈이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세 인물이 둘러앉아 있다.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탁자 위에는 자신의 몸을 쪼개고 비우고 내어주시는 성례전의 상징물이 담긴 그릇이 하나 놓여 있다.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분들의 고요한 앉음새는 세상의 어떤 풍파도 범접할 수 없는 고요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림이 주는 감동을 함께 나눈 후, 그에게 마음을 살피는 기도와 마음을 들어 올리는 기도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말해줬다. 황혼 무렵의 비감함으로 찾아왔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옛 성인은 우리가 대지를 딛고 서기 위해서는 다만 몇 자의 땅만 필요하지만, 실제로 쓰지 않는 땅을 모두 파 없애 버리면 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주위가 온통 벌어진 틈이고, 허공이라면 누군들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성인은 그 이야기를 통해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로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 순례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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