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대롱으로 보는 세상을 넘어 2010년 01월 22일
작성자 김기석

대롱으로 보는 세상을 넘어

 

어느 결에 절기는 대한을 지나 입춘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몸과 마음 두루 평안하신지요? 멀리 하얗게 눈을 이고 서있는 산봉우리들을 보니 영문 모를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 떠난 자의 고적함이 느껴지니 웬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빈 가지로 칼바람을 맞이하는 겨울나무가, 눈을 이고 선 바위 너설이 일상의 느른함에 빠진 저를 흔들어 깨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얼음장 밑으로 눈석임물이 흐를 것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질펀한 생명의 노래 울려 퍼지겠지요? 절서는 이렇듯 어김이 없습니다.

 

긴긴 겨울 밤, 식구들이 오순도순 아랫목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던 때가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여겨지니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너무나 분주하게 살아왔습니다. 숨가쁘게 살다보니 문득 우리가 이야기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 기억에 각인되는 이야기는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 인간에게는 서사적 정체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들은 이야기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말일 겁니다. 이야기는 기억을 창조하고, 기억은 정체성을 창조하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은 상상 속에서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습관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는’ 동물이라더군요. 인생은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앨래스대어 맥킨타이어의 말이 늘 귓가에 맴돕니다.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질서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대로를 따라 숨 가쁘게 달려가는 이들도 있고, 성공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자기 보폭에 맞게 걸어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길은 다양하지만 우리는 ‘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은 늘 어려운 과제입니다. 생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지향이 분명하다 해도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 바라보면 목표 지점이 선명하게 보이다가도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 지점은 눈앞에서 안개 걷히듯 사라질 때가 많습니다. 이게 인생인가요? 길은 그렇게 존재와 비존재 사이로 나있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요8:14), “나는 길이다”(요14:6) 하셨던 분이 부러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를 길로 삼아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 그 길은 파도가 밀려오면 곧 지워지는 모래 위 발자국처럼 사라질 때도 많았습니다. 성년의 숲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방황했다는 카프카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는 괴테의 말을 위안 삼았습니다. 인생의 길 찾기에 가장 중요한 지도는 물론 성경입니다. 그러나 독도법을 모른다면 지도는 무용지물입니다. 지도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도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지도만 보아도 계곡의 물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계곡에 깃들어 사는 새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성경을 읽는 눈이, 그리고 삶을 읽는 눈이 이렇게 밝다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현상이나 표상을 통해 우리에게 암호의 형태로 전해지는 초월자의 뜻을 해독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과제라고 말한 것은 철학자 칼 야스퍼스입니다. 20대 초반 초월자의 암호라는 말을 만나는 순간 세상은 무의미한 공간이 아니라, 돌연 의미로 충만한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자연 현상이나 역사적 사건, 심지어는 범속해 보이는 일상의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려고 애썼습니다. 세계는 우리가 일상의 삶을 통해 조금씩 밝혀야할 신비의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 눈이 더 밝아질까, 귀가 밝아질까 했지만 여전히 무명 속을 헤매고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하지만 저의 길 찾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초월자의 암호 해독을 위한 공부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저를 보며 ‘책이 그렇게 좋으냐?’고 빈정댑니다. 삶에 밑줄을 긋지 못하고 책에 밑줄을 긋는 모습이 답답해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책에 빠져 살지?” 답은 너무나 평범합니다. 그게 제게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역사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온 몸을 내던지는 이들을 보면 부끄럽기도 합니다. 노동으로 투박해진 사람들의 손을 볼 때면 굳은 살 하나 없이 멀쩡한 저의 손을 슬그머니 숨기기도 합니다. 멈칫거리며 그들 곁에 다가서기도 하지만, 여전히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저의 고질병이기 때문일 터입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에리히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를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호메로스의 문체와 성경의 문체를 비교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호메로스의 인물들이 자기 운명에 매여 있는데 비해 성경의 인물들은 거대한 운명의 변전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기를 형성해 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성경을 문학적으로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독창적이고 역동적인 문헌이었습니다. 제1성경(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시련과 갈등, 그리고 고양의 체험은 오늘의 우리도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역사적 성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그런 발전의 요소 때문일 겁니다.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간>>을 읽지 않았더라면 성서 기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배후 혹은 이후를 상상하는 버릇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페키치는 기적이 오히려 평범한 삶의 질서를 깨뜨려 그들을 불행에 빠뜨릴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세상의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고 스스로 소경이 되기를 택하고, 말을 하게 된 벙어리는 바른 말을 하다가 박해를 받고, 고침 받은 나환자는 정(淨)한 세계와 부정(不淨)한 세계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외톨이가 됩니다. 이런 뒤집어보기에 직면했기에 삶의 접힌 부분에 눈길을 주는 버릇을 들이게 되었으나 고마운 일입니다.

 

엔도 슈샤쿠의 여러 책들을 읽지 않았다면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의 예수보다 무력한 이들 곁에 머물던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엘리 비젤, 마틴 부버, 그리고 사무엘 조세프 아그논을 몰랐더라면 제1성서(구약)의 역동성과 깊이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유다인들에게 토라와 전례의 의미는 무엇이고, 역사의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을 배웠습니다. 저는 특히 시인들에게 빚을 많이 진 사람입니다. 시인들의 세계를 곁눈질하지 않았더라면 언어의 함축성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중층적 시선을 배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의 비늘이 벗겨져 나갔지만, 저의 경우는 책을 통해 조금씩 무명의 백태가 벗겨져 나간 것 같습니다. 물론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기만 합니다.

 

가끔 제 방에 들어오는 이들이 둘러싸인 책들을 보며 “여기 있는 책을 다 읽으셨어요?” 물을 때마다 애매한 웃음으로 그 상황을 얼버무리곤 했습니다. 욕심껏 책을 구해놓기는 하지만 읽지 못한 책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이 주는 든든함이 있습니다. 언제든 그 책은 제 인생길의 지도가 되어주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책도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통속적이지만 어떤 진실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책과의 만남에는 분명 어떤 인연이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지금의 제 모습은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들이 남겨놓은 흔적일 터입니다. 대학 시절 콜린 윌슨이 내 또래의 젊은 나이에 쓴 <<아웃사이더>>를 읽으며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 지성의 깊이와 텍스트에 대한 정치한 이해, 사물과 사태에 대한 통찰력이 20대 초반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루한 20대를 책과 더불어 씨름했던 것은 따지고 보면 콜린 윌슨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최인훈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까뮈 전집, 카프카의 책들, 니코스 카잔차키스, 가브리엘 마르께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밀란 쿤데라의 책 속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시간은 참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루쉰에게 사로잡혔던 시간의 설렘도 떠오릅니다. 이후에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뒷세이아>>,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 속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러다보니 책이 늘었습니다. 잠시 제방에 들른 어느 선배 목사님은 이중 삼중으로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며 “책들이 좀 답답해하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합니다. 언젠가는 이 책들과도 헤어져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시인 강은교 선생님이 아끼던 책을 고물장수에게 무게를 달아 책을 팔아넘긴 마음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짠해집니다. 제 책의 운명도 어쩌면 그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한 권 한 권 손때 묻은 책들과 이별할 준비를 못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날줄(經)로 삼고 다양한 경험과 실천을 씨줄(緯)로 삼아 짜가는 인생의 태피스트리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완성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모든 책을 내려놓고 그분과 눈과 눈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을 바라보며 지금도 여전히 비틀거리며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요즘 제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좋은 책을 교우들과 함께 읽는 것입니다. 토요일마다 진행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여러 해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도 독서모임의 책 목록을 따라 열심히 책과 연애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독서모임이 주는 유익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떤 이는 마치 계시록에 나오는 비밀의 봉인을 여는 것처럼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접하는 것 같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의식의 변화와 확장을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가지고 있었던 견고한 편견에 균열이 생기는 느낌이었다면서 마음의 진보라는 게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나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면서, 내적으로 든든해진 느낌이 들어 이제는 허둥거리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옛 성인이 말한 바와 같이 이기적인 생각은 비우고 그 내실을 든든히 채워가는(虛其心, 實其腹)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기독교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지성의 결핍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주체로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은 믿음과 성찰을 떼어놓았기 때문일 겁니다. 기독교인 하면 생각하는 단어가 ‘편협함’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참담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신 분을 따르는 이들이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세상이 무지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편견이라는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한 우리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며칠 전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 연행(燕行) 200주년 기념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굳센 기상이 느껴지는 글씨를 둘러보다가 1811년 10월에 옹방강이 학문하는 자세를 써서 추사에게 보낸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편액 앞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거기에는 학문하는 자의 자세를 가르치는 방서(傍書)가 함께 적혀 있었는데, 추사는 그 글을 평생 부적처럼 품고 살았다고 합니다. 옹방강은 고금의 사적을 고증하는 일은 산처럼 바다처럼 높고 깊지만 하나의 근원에 도달하면 모든 핵심을 꿰뚫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러합니다. “사실의 조사는 책으로 해야 하고(覈實在書) 이치 연구는 마음으로 해야 하네(窮理在心).” 세상을 알기 위해 다부지게 공부하면서도 마음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겁니다. 이 말이 큰 도전이 되어 다가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횡설수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책과 더불어 걷는 길이 우주의 중심이신 분을 향한 순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려니 생각하시고 널리 해량하여 주십시오. 더욱 눈이 밝아지고, 마음 쾌청한 한 해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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