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악덕 위에 세운 삶을 넘어 2010년 01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악덕 위에 세운 삶을 넘어

-헤르만 요제프 초헤 신부의 <<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라.

그리고 모든 것이 그대 자신에게 달린 것처럼 행동하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 실존으로서의 인간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신이 아니라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 말했다. 이것은 인식 주체의 탄생을 예고하는 아테네식 계몽주의 혹은 휴머니즘 선언이다. 그런데 정말 ‘안트로포스anthropos’가 세상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metron’일 수 있는가? 시간 속에서 의미를 묻는 인간은 언제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생의 갈림길에서 내적 갈등을 겪으며 부단히 ‘어떻게 해야 하나?’를 물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모든 기준이 마음속에 있다면 현실을 규제하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아테네인들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운명이란 인간의 의지나 마음먹기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인가?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임마누엘 칸트를 사로잡았던 이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나찌 시대의 광기를 몸으로 경험했던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제목을 <<이것이 인간인가?>>로 붙였다. 인간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수수께끼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하면,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론’을 썼지만, 아무리 읽어도 우리 자신의 실존의 비밀은 풀리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가 빚어내는 삶의 무늬로만 자신을 의식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는 인간을 다룬다. 아니, 그중에서도 가인의 후예들이 만든 도시에 밀집하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다룬다. 원제가 <<우리 시대의 일곱 가지 대죄>>(Die sieben Todsünden unserer Zeit)인 이 책의 저자 헤르만 요제프 초헤 신부는 현재 남 슈바르츠발트에 있는 발트키르히 교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소속된 수도자이다. 그는 유명한 컬럼니스트이고, 기업과 경영 분야에게 활발한 자문 활동을 하고 있는 존경받는 종교인이다. 기독교 전통 안에 갇혀 있던 신학언어를 세속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는 그는 기독교적 가치를 일반인들에게 전달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

 

• 당연의 세계에 물음표 붙이기

초헤 신부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째, 쾌락(Luxuria, 음란), 탐식(Gula), 무관심(Acedia, 나태), 시기심(Invidia), 분노(Ira), 자만심(Superbia), 탐욕(Avaritia)이라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가 우리 시대의 삶 속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둘째,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미덕은 무엇인가? 그는 우리가 흔히 ‘칠죄종’(七罪宗) 혹은 ‘일곱 가지 대죄’라 일컫는 악덕의 목록이 중세에 나타난 까닭을 묻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 목록이 신자 대중을 교화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고안된 장치라고 말한다. 이런 죄를 저지른 이들이 지옥에서 받게 될 처벌을 열거하고, 처벌에 대한 공포를 지렛대로 하여 교회 권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칠죄종과 지옥은 신자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그들의 순종을 확보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적 고안품이라는 말이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또한 지나치게 한쪽만 바라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목록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다는 우리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도록 좋은 거울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2008년 바티칸 교황청은 환경파괴,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과학실험, DNA 조작과 배아줄기세포연구, 마약거래 및 복용, 소수의 과도한 축재, 낙태, 소아성애 등 ‘세계화 시대의 신 칠죄종’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초헤 신부는 이런 모든 요소들이 전통적인 ‘칠죄종’ 속에 이미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초헤 신부의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부정적 속성에 ‘대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죄’는 인간이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생의 한계상황이다. 그렇기에 ‘죄’와 짝을 이루는 말은 ‘용서’이다. 우리 삶을 안팎으로 규정하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에 ‘죄’라는 찌지를 붙이는 순간, 그 문제는 우리 의지와 결단을 비껴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초헤 신부는 ‘대죄’라는 말 대신 ‘주요 악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악덕이란 “인간의 행동이나 의식의 정도가 지나칠 때 죄로 빠져들 수 있는 성격상의 특징”(8)이다. 악덕이란 일종의 죄의 가능태인 셈이다.

 

“이런 충동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반복적으로 굴복하며 사악한 습관이 자라는 것에 맞서지 않고, 이것들이 영혼에 자리를 잡아 성격으로 굳어져 결국 사람을 이기고 지배할 때 비로소 죄가 성립하는 것이다.”(9)

 

철학, 신학, 경제학, 사회학을 두루 공부한 지식인답게 저자는 우리가 그 속에 속해 있기에 오히려 볼 수 없는 현실과, 그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악덕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가치에 물음표를 붙인다? 그가 붙인 물음표 앞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근대적 삶의 양식이 과연 인간다운 삶의 길인지, 또 행복의 길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기독교 전통이 가르쳐온 ‘대죄’ 혹은 ‘일곱 가지 악덕’이 어떻게 변장한 채 나타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 삶을 교묘하게 지배하는지 식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 인간관에 영향을 미치는 악덕

현대 세계에서 쾌락은 성공 지향적 삶이라는 매력적인 의상을 입고 찾아온다. 성공과 자본과 이윤이 새로운 삼위일체로 등장한 오늘, 성공은 곧 권력의 획득이고, 권력은 또한 성적 매력이기에 현대인들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이다. 성공은 밑빠진 독과 같아서 만족을 모른다. 성공 중독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의미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인생의 한계상황은 그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 물음 앞에 세우고, 그는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성공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은 의미를 추구하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무엇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없는지를 전적으로 스스로 규정”(30)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창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의미한 성공은 성공 없는 의미보다 더 나쁜 것이다.” “성공 없는 의미는 성격을 형성해주지만 의미 없는 성공은 성격을 파탄한다.”(33) 저자가 쾌락이라는 악덕을 미덕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길로 제시하는 것은 검소한 생활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검소함이란 내적 충실함의 외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탐식이라는 악덕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현전하는가? 초헤 신부는 쏟아지는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획득하기 위한 애처로운 노력이야말로 탐식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탐식은 가려서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삼키고 닥치는 대로 채워 넣는 것”(41)이다. 현대인들은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신변잡기적 소문으로부터 새로운 제품의 정보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사람들의 대화는 의미의 심층을 파고들지 않는다. 저자는 체험과 경험을 구분한다. “체험은 순수하게 감각적인 느낌이며 인지의 첫 단계”이고, 그런 “내면의 체험이 정신적으로 평가될 때 비로소 그것은 경험이 된다”(49)는 것이다. 숙고와 성찰의 과정을 거친 체험이야말로 경험이라 말할 수 있고, 그런 경험의 교환이야말로 의미 세계로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 탐식이라는 악덕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일상생활의 속도를 늦추고, 다른 이들과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의미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데 있다.

 

무관심이라는 악덕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신호는 “부동자세, 의미에 대한 권태감과 나태한 마음”(60)이다. 이것은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기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나른한 행복에 취하는 수동적 객체로 스스로를 전락시키는 태도이다. 하비 콕스는 나태를 경계하기 위해 ‘뱀이 하는 대로 버려두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한 인물 이반은 빵을 위해 자유를 유보한 사람들은 재림한 예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인상적으로 증언했다. 무관심 혹은 나태를 극복하고 주체로서의 자유를 누리려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회복해야 한다. 초헤 신부는 무관심에 맞서는 미덕으로 정열을 든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정열적인 반항조차도 나태한 무관심보다는 낫다”(75)는 것이다. 인권이 유린되고, 인간적 가치가 가차 없이 짓밟히는 세상을 보면서도 영혼의 깊은 잠을 자는 교회를 향해 세상은 ‘당신들의 천국’이라고 비아냥거린다. 과연 교회는 달콤한 뱀의 유혹을 뿌리치고 스스로 역사 변혁의 주체로 설 수 있을까?

 

시기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문”이라는 스코틀랜드 격언은 참 명료하다. 초헤 신부는 현대사회를 이벤트 사회라고 말한다. 재미를 찾아 떠도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디즈니랜드인 셈이다. 이벤트 사회의 특색은 체험이 의미를 앞선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구매하는 것은 필요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들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자기를 드러내보이려는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것을 ‘기호로서의 소비’라 명명한 바 있다. 사람들은 도구의 기능보다는 위세와 행복을 구매하는 일에 익숙하다. 파시스트적 속도로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시기심에 사로잡힌 영혼은 나 혼자 기회를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 늘 불안해한다. 자본주의 세상은 우리의 욕구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에 익숙하다. 사실 그것은 참 쉽다. 시기심이나 질투, 시샘을 조장하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시기심이라는 악덕을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은 어디에서 생길까? 역시 답은 의미이다. 사람들이 이벤트를 찾아 떠도는 까닭은 아직 의미의 평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미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자비와 베풂, 기쁨을 나누는 삶의 태도”(102)야말로 시기심이라는 악덕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분노 전염병처럼 현대인들을 괴롭힌다. 모든 성공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분노한다. “분노는 반대를 견디지 못한다. 분노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하면 굶주림에 빠진다. 분노는 부당한 대접, 굴욕, 한계를 경험하면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109) 분노에 사로잡힌 영혼은 실패와 좌절이 정상적인 삶의 구성 요소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성과주의적인 삶의 지향을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강자와 자기를 동일시하기 쉽고, 그러한 동일시가 불가능할 때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분노가 자기를 향할 때 그것은 자기 파괴로 나타나고, 외부로 향할 때 폭력으로 나타난다. 분노라는 악덕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저자는 침착성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이 말은 어쩌면 ‘평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좌절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영혼의 성숙이야말로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악덕

자만심은 우리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악덕이다.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말 위에 높이 앉아 있는 기사의 모습이 자만심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은 “과학자의 흰 가운”이 자만심의 상징이다. 검증 가능하고 증명 가능한 것만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과학주의는 인간의 삶에서 감성적인 지각과 직관, 영감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런 과학주의를 경제적으로 번역한 것이 세계화라는 미명으로 빈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터보 자본주의(Turbo Capitalism)이다. 자만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만하는 자는 자신만의 환경에 갇혀 있으며, 보편적인 대중의 논란에 관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147) 지금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사회적 논란과 정치적 갈등은 자만심에 사로잡힌 영혼이 빚어내는 혼돈에 다름 아니다. 자만심이라는 악덕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저자는 경이감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고한 시인 구상은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시에서 삶의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한다. “두 이레 강아지만큼/은총에 눈을 뜬다./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나는 죽고 그 덧없음이/모두가 영혼의 한 모습일 뿐이다.” 자만심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모든 존재의 유일무이함에 눈을 떠야 한다.

 

저자가 다루는 마지막 악덕은 탐욕이다. 욕망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요소이다. 욕망의 불꽃이 다 꺼진 사람은 죽은 사람이거나 도인일 것이다. 욕망은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하지만 욕망의 과잉이 늘 문제이다. “탐욕에 물든 사람은 만족을 모른다. 탐욕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소유욕의 한계를 넘어서며 모든 이성적인 이유를 외면한다.”(158) 탐욕은 유용성과 무관하며 탐욕에 물든 사람은 인정이 없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시키는 순간, 지배와 통제가 용이해진다. 탐욕은 일쑤 광기와 손을 맞잡는다. 숫자들은 우리 속에 잠든 탐욕을 일깨우는 미끼이다. 어른들은 계량화하고 수치화해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어린왕자의 탄식이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인 경우가 많다. 우리 삶을 따뜻하게 하는 우정, 사랑, 함께 함, 즐거움, 기쁨 등은 수치로 파악될 수 없다. 별 하늘과 저 풍요로운 대지 앞에 설 때 느끼는 숭고의 느낌을 어떻게 액수로 환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는 시인의 말은 아라비아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시인의 공포를 드러내는 말이다. 탐욕이라는 악덕의 주술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의 초월성에 눈을 뜨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초월성이란 ‘유일한 것, 진실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171)이다. 존재의 초월성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현실보다 더 큰 세계, 곧 신의 현존 앞으로 이끌어 간다.

 

•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

이상에서 살펴본 일곱 가지 악덕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서로 얽혀 현대인의 삶을 내적으로 규정짓고 있다. 이런 악덕의 공통점은 없을까? 거칠게 요약하자면 의미에 대한 무관심과 타자에 대한 배려 없음이라 하겠다. 이것은 물론 초월의 세계를 잃어버린 세속화된 인간의 자화상일 터이다. 악덕이란 저항하지 않을 때 습관으로 굳어져 우리를 지배하는 힘이다. 그렇다면 악덕의 지배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덕은 무엇인가? 초헤 신부는 쾌락에 대조되는 미덕으로 ‘겸양’을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겸양이란 예의바른 태도가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노선”(187)이다.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외부의 현실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다. 탐식에 대조되는 미덕은 ‘금욕’이다. “‘금욕’이란 즐거워도 무분별하게 만취 상태에 빠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해도 무절제한 탐식으로 전락하지 않으며, 유머를 알아도 신랄한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고, 비판을 해도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생활태도를 말한다.”(193) 무관심에 대조되는 미덕은 ‘부동심’(不動心)이다. 부동심을 갖춘 사람은 무관심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거리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 부동심을 갖는 사람은 언제나 평상심을 유지하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시기심과 대조되는 미덕은 ‘기쁨과 나눔’이고, 분노를 교정하는 미덕은 ‘열정’이다. 열정은 지루한 무관심과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광증 사이에 놓여 있다. 열정적인 사람이 늘 경계해야 하는 것은 테러리스트의 열정 같은 허위의 열정이다. 이 시대의 교만을 극복할 수 있는 미덕은 ‘순종’이다. 순종이란 무기력한 굴종이 아니라, 자기 이상의 존재 혹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는 태도와 관련된 것이다. 탐욕에 대응하는 미덕은 ‘양보’다. 양보는 자신을 중심에 세우지 않는 태도와 관련된다.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서 불안을 제거해준다.

 

“세계 윤리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면서 세계 윤리를 구상했던 한스 큉은 종교 간의 평화야말로 세계 평화의 초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초헤 신부는 일상의 삶속에 마치 먼지처럼 깃들어 있어 사람들이 의식조차 못하고 사는 불화와 갈등의 씨앗을 분별해내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우리가 치열하게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주체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공동체적인 결단과 실천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대안 운동이나 공동체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몰주체적 삶의 습기(習氣)에 빠져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대안적 미덕을 보여주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류의 진보를 자랑하면서도 행동을 통해 자신의 혈통(나무에서 내려온)을 확인시켜 주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삶의 근본을 성찰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다.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다. 우리는 지금 과연 어떤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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