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2010년 01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조그만 행성 B-612에서 살다가 지구별 여행자가 된 어린왕자는 뾰족산에 올라 외쳤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친구를 찾는 그의 외침에 응답한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외롭다. 외롭다…’. 어린왕자의 외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의 굉음과 도시의 분잡에 묻혀 사는 이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외로운 것은 어린왕자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접촉을 그리워한다. 거리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이들은 많지만,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많지만,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많지만, 마음 속 헛헛증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빈정거리는 말투, 교만한 눈빛, 차가운 응대의 벽에 막혀 우리는 점점 갑각류를 닮아간다. 친밀한 사귐을 목말라 하면서도 상처받을까 두려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장벽을 세워 접근을 막는다. 관계를 맺을 줄 아는 능력이 퇴화될수록 외로움은 깊어진다.

 

어린왕자처럼 살다가 별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 시인 이성선은 <다리>라는 시에서 어느 날 우연히 보았음직한 광경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있다. 한가롭게 다리를 건너던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먼 산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넌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풍경을 그리던 시인은 어느 순간 자기 마음에 물결치는 일렁임 한 자락을 드러내고 만다.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이것은 외로운 시인의 마음 풍경일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시인은 혼잣소리처럼 덧붙인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다리>).

 

맥락은 다르지만 강도를 만나 입은 옷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된 채 버려진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생각난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다. 그를 도왔다가 자기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원초적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를 벗어났다고 하여 기억에 각인된 그 광경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심각한 자기 불화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고,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여러 기제를 작동시켰을 것이다. 위험이 예기되는 길을 홀로 걸어간 것은 그의 불찰이라는 소극적 탓하기부터, 그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죄인임에 틀림없다는 종교적 판단에 이르기까지 핑계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초월적 세계의 호출인 양심조차도 잠잠케 할 수 있을까?

 

작년 1월에 벌어진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마침내 오늘 거행된다. 354일만의 장례이다.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작년 1월 22일 참사 현장에서 벌어진 기도회 사회를 보면서 나는 황폐화된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며 외쳤던 예레미야의 애가 한 자락을 읊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그리고 “이들의 죽음을 허비한다면 우리 사회의 진보는 없다”고 단언하듯 말했다. 그 말이 마음의 빚이 되었다. 그동안 참 많은 이들이 현장을 찾았다. 그곳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가 계시겠다 이르신 갈릴리였다. 나는 그곳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교회를 보았다. 무더위와 강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와 말없이 유족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던 시민단체 회원들과 종교인들, 그들이야말로 풍경을 외롭게 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외롭다’는 어린왕자의 외침에 응답하여 달려와 친구가 되어준 이들이었다.

 

용산참사는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들, 분주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음화이다. 용산의 희생자들은 밀어붙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가장 연약한 이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진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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