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엄마가 희망입니다, 그리고 2009년 11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엄마가 희망입니다, 그리고

--김영봉 목사의 <<엄마가 희망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믿을 만한 도구는 문학과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문학과 예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근원적인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 문제들을 붙들고 씨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6, 7)

 

문학과 신학의 만남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그려지지 않는가? 저 쓸쓸한 마음의 풍경이. 도종환 시인의 시구를 읽으며 마음 한켠에 건들바람이 불어온다. 눈길을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성찰의 계절에 김영봉 목사의 <<엄마가 희망입니다>>를 읽는다는 것은 마침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맞은 격이다. 이미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울리고 있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전거로 삼아 그는 우리 내면의 풍경과 삶의 방식을 비추어 볼 거울 하나를 빚고 있다. 어머니/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무한한 공감의 바다이다. 세상에 불효자식이 아닌 자식이 어디 있겠으며, 자애롭지 않은 엄마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회고의 자리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발화되는 순간 우리의 심금은 마치 자명고처럼 저절로 울리기 시작한다. 신경숙의 작중인물인 ‘박소녀’는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나타내는 제유(提喩)이다.

 

<<엄마가 희망입니다>>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담긴 서브텍스트를 신학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읽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 속에 담긴 김덕용의 그림은 또 다른 차원의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화가는 나뭇결무늬 속에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나뭇결은 마치 세월의 켜처럼 고르지 않다. 그 속에 담긴 인물들은 박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기도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담담할 뿐, 감정의 흐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슬프고 또 고맙다. 김영봉, 신경숙, 김덕용. 이들 세 사람은 한 텍스트 속에서 수굿하게 만나며 독자들을 그 만남의 자리로 끌어들인다. 그대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며.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 교우들에게 선포한 말씀에 살을 붙인 것이다. 이 시리즈 설교를 하기 전에 그는 교인들에게 신경숙의 소설을 읽도록 했다 한다. 회중들은 설교를 듣기 전에 이미 충분히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이 아닌 소설을 텍스트로 삼아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성경이 메인 텍스트로 봉독되었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결정짓는 것은 소설의 내용이라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 설교는 성경에 대한 꼼꼼한 주석에 근거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김영봉은 문학과 예술도 진리를 추구하는 데 가장 믿을 만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당연한 이야기도 당연하게 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이미 영화 <밀양>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연속설교를 한 바 있는 김영봉 목사는 문학과 예술의 언어를 통해 신학의 언어를 풍부하게 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서재가 아닌 예배의 자리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늘 조심스럽다. 특히 그것이 문학의 소재가 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자칫하면 감상성이나 자기 연민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자아가 녹아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을 벗어나 보편적 생의 진실로 나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김영봉은 신학의 언어를 통해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길을 모색한다. <<엄마가 희망입니다>>는 <잊은 것은 잃은 것이다>, <사랑은 늘 배고프다>, <누구나 마음은 같다>, <용서가 길이다>, <모성이 희망이다>라는 제목의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땅의 박소녀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치매를 앓고 있던 박소녀 할머니는 생일상을 받으러 상경했다가 서울역에서 실종되고, 어머니를 찾기 위한 자식들의 백방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김영봉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을 “엄마를 잊고 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과 등치시킨다. 다소 뜬금없기는 하지만 이 문장의 속뜻은 박소녀는 실종되기 전부터 이미 가족 모두에게 실종된 상태였다는 말이겠다. 어머니가 사라진 후에야 자식들은 비로소 서울에서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한 자신들의 삶에 난 큰 공백을 본다. 어머니의 실종은 어머니를 마치 투명인간처럼 대하며 살아온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영봉은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바로 ‘실종된 박소녀’라고 말한다.

 

1978년 <<씨알의 소리>> 5월호에는 함석헌 선생의 아내 황득순 여사의 부음이 실려 있었다. 함선생은 “나야 뭐”라는 제목을 붙인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내를 추억하며 “아내는 누가 지어주었는지 모르나, 이름자대로 순(順)이었습니다. 그저 순종해 산 일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파킨슨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아내의 주검 앞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나의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을 대신 받은 것이요, 나의 생애의 마지막 손질을 하기 위해 희생이 된 것이다.” 입관을 마친 후 자녀들의 회고담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내의 별명이 “나야 뭐”인 것을 알았다 한다. 먹을거나, 입을거나, 뭣에서나, 자기는 늘 빼놓으면서 늘 하는 말의 첫 머리가 “나야 뭐…”였다는 것이다. 이 땅의 ‘박소녀’들의 또 다른 이름은 어쩌면 ‘나야 뭐’ 혹은 ‘순順’일지도 모른다. 함석헌이 아내의 삶과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을 읽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영봉은 고난을 끌어안는 박소녀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이런 관점은 감동적이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누군가의 희생에 박수를 보내면서 그를 희생시켜온 구조를 온존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과거에 엄마들이 홀로 져야 했던 짐을 모두가 나누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희생자들에게는 이런 당부를 덧붙인다. 첫째, 지금 당하는 희생과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그럴 상황이 되면 기쁘게 벗어나라. 둘째, 희생과 고난을 짊어지고 가는 동안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대상을 찾으라(43쪽 참조). 매우 실제적인 충고이다.

 

“그 앞에서는 무참히 무너져 내려도 좋은 사람, 무슨 이야기든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나를 탓하지 않고 내 모든 원망과 투정, 응석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내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오물을 다 받아주고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48)

 

박소녀에게 이런 사람은 남편도 자식도 아닌 이은규이다. 빼앗겼던 밀가루 함지를 찾으러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찾아간 이은규의 집에서 박소녀는 난산 중인 그의 아내와 노모를 발견한다. 박소녀는 얼떨결에 산모를 도와 아기를 받아내고 도둑맞았던 밀가루로 급히 수제비를 만들어 온 가족을 먹인다. 나중에 그 산모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는 틈나는 대로 그 집을 찾아가 엄마 잃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곤 한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이은규는 삼십 년 동안이나 박소녀가 찾아가 쉴 수 있는 그늘과 샘물이 되어주었다. 박소녀에게 이은규는 고단한 생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뗏목이었다. 김지하는 “갇힌 삶에도/봄 오는 것은/빈 틈 때문”(<틈>)이라 했다. 그 빈 틈이야말로 생명을 싹 띄우는 파랑바람이 불어오는 통로가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은규가 사는 ‘곰소’가 박소녀에게 일종의 ‘성소’라면, 기독교인들의 성소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지당한 말이지만 이런 발 빠른 치환이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

김영봉은 <사랑은 늘 배고프다>라는 장에서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고 정작 자신은 텅 비어버린 어머니에게 집중한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위해 한없이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도 “이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존재들이다. 저자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줄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런 사랑을 ‘진품 사랑’이라 일컫는다. 부부 간의 관계든, 부모 자식 간의 관계든 이해가 개입되고 조건이 개입되는 순간 그 관계는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보험금을 타내 강남에 살고 싶다는 욕망에 굴복해 친구를 시켜 엄마와 누나를 살해한 어느 청소년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벼랑 끝에 서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동하는 공포가 스멀스멀 일상에 스며들어 우리 의식을 옥죄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갑각류처럼 마음에 단단한 울타리를 두르고 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행동을 저지르도록 유인하는 상황과 시스템의 영향력을 가리켜 ‘루시퍼 이펙트’라고 말한다. 루시퍼들이 횡행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면서 인간됨을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존중받고 사랑받았던 기억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질병은 ‘권리’를 찾느라 ‘희생’을 잊고, ‘평등’을 구현하느라 ‘섬김’을 잊고,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느라 ‘자기희생’의 덕을 잃은 데서 비롯된 것(99)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사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그런 사랑을 살아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머니,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인 이름이지만 우리는 그 어머니도 자신만의 꿈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누구나 마음은 같다>라는 장에서 저자는 누구도 어떤 역할로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깨달음은 계시처럼 찾아온다. 소설 속의 큰 딸이 어머니 집에 잠시 들른 어느 날,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동생 있는가?”라는 음성이 들린다. 엄마는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더니 “오빠! 오빠!” 하며 찾아온 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쳤다. 딸은 이때 처음으로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고, 자기만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박소녀.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 혹은 아이들의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녀에게도 남편이 필요했고, 아버지도 필요했고, 엄마도 필요했습니다. 오빠도 필요했고, 친구도 필요했습니다. 그녀 안에는 어리광 부리고 싶은 어린아이도 있었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눈물짓는 문학소녀도 있었으며, 봄바람에 마음 설레는 처녀도 있었고, 멋지게 차려입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중년 부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110)

 

김영봉은 자연스럽게 자기의 어머니를 기억해낸다. 외항선을 타고 돌아다니던 삼촌의 옷가방을 정리하다가 나온 화사한 여자 옷을 입어보며 즐거워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지만, 그 낯선 모습이야말로 어머니가 억누르고 있던 내면 풍경의 일부였음을 이제서 깨닫는 것이다. 어머니뿐인가? 세상의 어떤 존재도 하나의 역할 속에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 늘 어련무던하게 살아가는 이들 속에도 왕자 유목민 전사 요부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억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전체를 이루는 일부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을 항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이 가리키는 바도 그것일 것이다.

 

<용서가 길이다>라는 장에서 저자는 용서의 문제를 다룬다. 남편과 손위 시누이는 박소녀의 삶에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었다. 늘 밖으로만 떠돌면서 가정의 모든 짐을 아내에게 떠넘겨버린 남편, 일찍 혼자가 되어 동생 집 근처에 살면서 시어머니 노릇으로 박소녀를 괴롭혔던 시누이. 그들은 박소녀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자기들의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자각한다. 김영봉은 이 대목에서 용서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역설한다.

 

“한 사람의 마음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마음에 쌓인 분노를 푸는 길은 진실하게 용서를 비는 것밖에 없습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 행동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을 안겨줍니다.”(171)

“용서를 할 때 가장 큰 덕을 입는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사람 자신입니다.”(176)

 

저자는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두 가지 비결을 말한다. 첫째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180)이고, 둘째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용서를 기억하는 것”(183)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이 이미 사라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아직 상처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에게 용서를 요구한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용서를 통해 마음의 부담을 해소해 버리기보다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 스스로 성찰해가는 것이 나을 때도 있는 법(홍세화)이다. 종교적 담론이 때로는 불의에 대한 의분을 억누르고, 우리를 감상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기에 하는 말이다.

 

모성과 부성의 조화

<모성이 희망이다>라는 마지막 장은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괴테의 견해를 내면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큰딸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리아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큰딸은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흡수하여 새로운 생명을 낳은 십자가의 기적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시작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어머니가 보여주는 사랑의 원형임을 깨닫습니다.”(209)

 

물론 김영봉은 모성적 사랑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바깥으로 흘러넘쳐야 한다고 말한다. 박소녀는 그런 사랑의 전범이다. 하지만 버림받은 아이들을 거두어 주고, 자식들이 보내주는 돈의 태반을 소망원에 보낼 뿐만 아니라 그곳에 가서 아이들을 씻기고 청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박소녀에 대해 세상은 무심하다. 박소녀의 실종은 모성이 증발된 사회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라고 말할 때 저자의 언어는 결기에 차있다. 내친 김에 그는 인정의 사막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치유책을 제시한다.

 

"보수든 진보든 관리보다는 돌봄, 감독보다는 살핌, 처벌보다는 격려, 통제보다는 관용, 정리보다는 조화, 효율보다는 개성, 질서보다는 자율을 미덕으로 삼는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합니다."(223)

 

‘가정에서의 모성 회복’과 ‘사회에서의 모성 회복’을 강조하는 그는 ‘교회의 모성 회복’도 언급한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지도력이 근본적으로 모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모성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남성중심의 교권 체계를 만들어온 교회가 오늘의 문제를 낳고 있다면, 교회의 미래는 모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는 견해에 동감한다.

 

하지만 모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다소 염려스러운 게 사실이다. 저자는 부성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성에 치우쳐왔던 우리 사회 혹은 교회의 균형을 모성을 통해 바로잡자는 뜻에는 공감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을 지배하는 가치가 부성적 가치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세심한 성찰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사회에는 번듯한 직장과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른의 몸을 입고 돌아다니는 소년들이 많다. 어떤 사회학자는 이 시대를 가리켜 ‘유아적 엄살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카리스마적 존재에게 매이고 싶어하는 의존 심리는 또 어떠한가? 강박감과 외로움을 이겨내기 어려워 술이나 마약 혹은 오락거리에 탐닉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할 모델로서의 ‘아버지’가 아닐까? 루브르 박물관에서 17세기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목공소의 성 요셉과 어린 예수>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익숙하지만 낯선 정서가 떠오른다.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림, 그것도 아버지의 일터에서 공구를 다루는 아버지를 돕느라 촛불을 밝혀든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예수에게도 아버지가 있었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감 말이다.

 

문학 작품 속에 녹아든 메시지를 찾아내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언어로 그것을 재해석하고 확장한 김영봉의 시도가 한국교회의 담론의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엄마가 희망입니다’라는 말 뒤에 주눅 들린 목소리로 슬쩍 덧붙인다. ‘아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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