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고생 만앗지야 2009년 11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고생 만앗지야

 

하솔식당은 교회 사무실 식구들의 두레밥상에 붙인 정겨운 이름이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던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밥을 먹으러 다니는 것이 고역처럼 느껴질 무렵 우리는 독립을 택했다. 우리는 ‘외식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대로 산다는 말장난으로 시작한 밥상공동체, 반찬은 각자 집에서 싸오고 밥은 함께 지어 먹는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 좋고, 사람들 속에서 복닥거리지 않아도 되니 즐겁다. 누군가가 별식이라도 가져오는 날이면 칭찬이 늘어진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 메뉴는 병어조림이었다. 바특한 병어조림을 먹으며 행복했다. 음식 맛도 맛이려니와 그 병어조림에 덤으로 딸려온 이야기가 오히려 알천이었다.

 

병어조림을 싸 온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에게 병어를 가져다 준 이는 생선을 떼다 파는 것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먼 일가붙이였다. 시간이 생명인 직업인지라 늘 분주한 데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는 계절의 진미라며 이런저런 생선을 가져다주었다.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마다지 않고 찾아오는 그 정성스러움에 기껍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물기어린 음성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는 그를 가리켜 “자칫하면 끊어질듯 위태로운 우리의 가족 관계를 이어주는 든든한 실”이라고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는 어떻게 조각난 마음을 이어주는 실이 될 수 있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죄인이란 ‘자기 자신 안으로 꼬인 인간’을 이르는 말이라 했다. 죄는 따라서 자신에게 갇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마음을 닫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타인을 향한 배려와 애태움이야말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실이 된다.

 

음악 용어 가운데 레가토라는 것이 있다. 둘 이상의 음을 이어서 부드럽게 연주하라는 표시를 이르는 말이다. 사람도 레가토가 될 수 있다. 조각난 마음을 이어주어 서로 통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레가토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장엄한 어구로 시작되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말은 뭔가를 창조한다. 물론 그 말은 발화된 말뿐만 아니라, 몸짓이나 눈짓 혹은 표정 속에 감춰진 말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 시대를 횡행하는 말들이 창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불신, 미움, 갈등, 거친 심성, 냉소 등이 아닌가?

 

모임에서 고두현의 시 <늦게 온 소포>를 함께 읽었다. 서울에 사는 아들은 남해에 계신 어머니가 부쳐온 소포의 포장지를 뜯으며, 그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매듭에서 주름진 어머니의 손마디를 느낀다. 남루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풍경이 아령칙하게 떠오르는 순간, 시인은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를 소개한다.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됐다고 몇 개 따서/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봄 볕이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 모임에서 이 시를 함께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구어체 시어 속에 담긴 것은 어머니의 따사로운 마음이었고, 동시에 든든함이었다. 이 각박한 시대에 듣는 ‘고생 만앗지야’라는 위로의 말은 의례적이 아니기에 더욱 치유의 말로 다가온다. ‘봄 볕이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이 말은 별별 꼴을 다 보며 땅에 엎드려 살아온 노인의 말이기에 더욱 울림이 크다. 철저한 낙관주의라는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이 말 한 마디는 이 덧거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아들딸들에게 큰 힘이 되지 않겠는가.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굉음 속에서 멍들고 찢긴 마음들이 거리를 서성인다. 따스한 말, 진정한 말 한 마디 그리워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말, 잃어버린 살맛을 되찾게 해주는 말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쓸쓸한 계절에 수능 시험을 보느라 지치고 지친 아들딸들에게 사랑의 인사를 건넨다. ‘고생 만앗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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