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선포한 말씀과 삶 사이의 거리 좁히기 2009년 10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선포한 말씀과 삶 사이의 거리 좁히기

-민영진 박사의 <나의 설교를 말한다>에 대한 논찬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 민 박사님의 명석한 강의를 듣던 때가 떠오릅니다.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를 듣던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독서 카드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하시던 강의는 마지막 장이 넘겨지고 나면 어김없이 종이 울렸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에 성심껏 답을 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시간안배를 잘 하실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놀랍기만 합니다. 벗들과 한 마디 대화를 나눌 때도 주변을 살피는 게 버릇일 수밖에 없던 그 엄혹한 시절, 지금은 좀 노추하게 변해버린 어느 저항 시인의 시를 남몰래 복사해 읽고 또 읽다가 선생님께도 한 부 전해드렸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가끔 학생회에서 설교 부탁을 드릴 때도 있었는데, 민 박사님은 늘 “응, 한 주간 정도 생각해보고 영감이 떠오르면 할게. 떠오르지 않으면 못하는 거고.”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어렴풋하게나마 설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 가슴에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설교의 시작은 ‘들음’이라는 사실을 지금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갑골문, 금문학의 대가인 시라카와 선생을 통해 ‘口’ 자에는 세 계열의 글자가 있음을 배웠습니다. 입을 뜻하는 口, 일정한 구역을 뜻하는 口, 그리고 신의 뜻을 묻는 축문 그릇을 그린 ‘ㅂ’자 모양이 변형된 ‘口’가 그것입니다. ‘聖’에 포함된 ‘口’를 축문 그릇으로 본다면 결국 거룩함이란 신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고 새길 수 있겠습니다. 1980년대 말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신도들은 그들의 설교자를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몰아쳤고, 성서 안에서 어떤 통찰을 얻도록 우리를 그리로 밀어붙였습니다”라는 고백 속에도 역시 ‘들음’이 중요한 모티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한 평생을 학자로, 번역자로, 설교자로 살아오신 민 박사님으로부터 다시금 설교의 중심은 ‘말함’이 아니라 ‘들음’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서를 마음의 귀로 듣기보다는 성서로부터 뭔가를 캐내려 할 때가 많습니다. 설교자들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다 심층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적극적 듣기’(attentive listening)를 주저하게 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합니다. 말씀은 늘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적당한 선에서 말씀과의 소통을 차단합니다. 설교의 타락이 시작됩니다.

 

언어의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설교는 수행적 기능과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설교는 초석적인 ‘말씀-사건’인 성경을 토대로 하여 또 다른 ‘말씀-사건’을 가능케 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민 박사님께서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은 현장 목회자인 저 자신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청중을 잃고 싶지 않고, 청중과 척(隻)을 지고 싶지 않아서” 청중과 타협하는 설교를 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또 말씀을 굴절시킴으로 결국 말씀을 변질시켰고, 어느새 청중들이 입에 넣어주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청중과 야합하여 그들에게서 세속적인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민 박사님의 치열한 신앙과 인문정신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당황스런 말씀입니다. 어쩌면 그런 고백은 누추하고 남루하게 변질되어버린 이 땅의 설교자들을 꾸짖기 위해 스스로의 종아리를 치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개교회 목회자로서 늘 빠지는 고민은 전해야 할 말씀을 어떤 수준에서 어떤 방법으로 전할 것인가 입니다. 설교는 선포이고, 선포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청중들로 하여금 어떤 삶을 지향하도록 촉구하는 것이기에, 늘 청중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는 정치적 수사가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보일 때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현실을 초월의 빛 가운데서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안온한 일상을 열망하는 이들의 마음에 불편을 낳습니다. 많은 청중들은 설교자의 선포를 정치적인 진술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언서는 성경에서 삭제되어야 마땅하고, 체제 비판적이었던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 사도의 서신도 제거되어야 합니다. 박사님은 예언자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예언자들이 겪는 운명 즉 홀로 버려지는 절대적 버림을 받지 않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눈으로 인간 실존을 주석하는 것”이 예언이라지요? 그렇기에 예언자의 길은 대중들로부터 멀어지는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들(예언자들)의 말은 맹렬한 공격이요 거짓 평안의 환상에 구멍을 뚫는 것이며, 책임 회피에 대한 도전이요 믿음을 회복하라는 촉구요 과연 분별력이 있으며 치우치지 않는가를 따지는 물음표다.”(아브라함 J. 헤셀, <<예언자들>>, 삼인, 이현주 옮김, 2004, 24-5쪽)

 

민박사님은 어느 시대에나 청중들은 똑같다면서 청중들은 듣고 싶은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고 하셨습니다. 설교를 방해 받았던 쓰린 기억 때문이겠지요. 동일한 경험을 한 이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사실 설교자들을 길들이려는 시도는 늘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해야 공정합니다. 청중의 문제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를 저는 설교자들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들은 듣지도 않은 말을 들었다고,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고 청중들을 속입니다. 그들은 ‘말’의 힘을 잘 압니다. 두려움과 욕망으로 분식된 종교적 언어는 자유로운 정신을 왜곡하고 억압하기 일쑤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말을 통제하는 데 진력했습니다. 말의 우상파괴적 성격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독재자들은 ‘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설교자들도 교회 안에서 독재자가 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다양한 말들을 혼란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의 독단은 억압에 굴종하면서도 자기 기만적인 만족에 젖어 살아가는 ‘아Q 형 신자’를 양산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청중의 문제보다 심각한 것은 참 말을 전하지 않는 설교자의 문제입니다. 청중들에게 강요한 침묵이 설교자들의 말의 타락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용어 선택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설교자는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전통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외부의 언어로 번역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설교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안팎을 두루 아우를 수 있는 폭넓은 교양과 어휘입니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불화는 어쩌면 이러한 소통 노력을 게을리 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앙은 물론 합리적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비신자들 혹은 아직 무른 음식 밖에 먹을 수 없는 신자들의 가슴에까지 미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하는 것은 설교자의 마땅한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민 박사님은 이사야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말을 해야 할 예언자는 침묵을 강요당하고, 들어야 할 백성은 말하는, 임무의 역전”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예언자의 말은 예언자의 존재와 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의 성공은 예고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변화를 이끌어내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청중의 닫힌 귀를 열어보려는 예언자의 치열한 노력은 행위예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어떤 일이 예고한 대로 일어나는 것은 예언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모순을 감수하면서라도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외쳐야 하는 것이 예언자의 운명입니다. 때가 되면 “봉인하여 묻어버려도 누군가가 그것을 꺼내어 유포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시인 정진규는 <밥詩․4>가 떠오릅니다. 착한 사람들이 지워지고 또 지워지기를 반복하지만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나쁜 사람들이 오히려 잘 사는 세상을 보며 사람들은 탄식합니다. “그러면 무엇해, 무엇해”, “소용없어, 소용없어”. 시인은 그런 이들에게 바다로 가자고 말합니다. 바다에 가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다도 몇천년을 그렇게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앞물결을 뒷물결이 싸악 지워내고 또다시 뒷물결이 앞물결을 싸악 지워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싱싱하게 싱싱하게 다시 채워지고 있을 것이다 지워지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다 분명하게 지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장 분명하게 다시 태어난다”. 지워지는 사람이 싱싱한 바다를 만들고, 세상의 밥이 된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민 박사님은 설교자의 두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욥의 친구들이고, 다른 하나는 제2이사야입니다.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관습적 신앙의 길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욥의 친구들. 신학 노선의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 적으로 돌변하는 그들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설교자들의 오만을 봅니다.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휩쓸었던 때,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뉴올리언즈 지역을 초토화시켰을 때, 그것을 불신앙과 타락한 문명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 설교했던 이들을 기억합니다. 가장 깊은 우정과 연민이 필요한 이들에게 던진 그들의 말 폭탄은 설교가 아니라 폭력이었고, 인간성을 향한 테러였습니다.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아니라 ‘함께 곁에 있어주는 이들’이었습니다.

 

민 박사님이 마음에 두고 계신 설교자의 모델은 제2이사야입니다. 고통 받는 이의 아픔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통해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또 그들 속에 현존하시는 구원자를 보는 눈을 가진 설교자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만연한 재난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관념화하고 추상화시키곤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삶과 연루되는 불편을 모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은 재난과 고통의 현장에 자꾸 나가보아야 합니다. 현장감각이 없는 설교는 ‘하늘의 독백’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고독을 동경하던 토마스 머턴 신부는 사목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보며 그들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연민은 나의 사막”이라고 고백합니다. 타자의 아픔 속에 들어가지 않는 설교자,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는 설교자는 자기 배만 불리는 목자가 아닐까요?

 

히브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탈무드 미드라쉬 카발라 문헌을 접했으면서도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 접근과 달라 건성으로 들었는데, 요즘에는 그쪽으로 점점 관심이 간다는 말씀을 들으며 공모의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꿈과 경험이 시간의 지층을 통과하면서 응축된 결과물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야기 자체 속에는 어떤 비평적 분석으로도 파헤칠 수 없는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대한 엄정한 해석은 마땅히 필요한 것이지만, 성서에 대한 고고학적인 분석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뭔가를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상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속에 부활하고 있는 생생한 예수, 몸을 가진 예수, 피가 흐르는 예수와 만나면서 민 박사님은 말씀의 ‘체현자’가 아닌 ‘번역자’로 살아온 나날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낯선 타자에게서 듣는 예수 이야기가 거울이 되어 자신의 실존을 돌아보게 만든 것 같습니다. 지금 민 박사님은 인생의 순례 여정 중 문학이라는 매혹적인 항구에 머물고 계십니다. 질문을 통해 생의 본질을 드러내는 문학의 언어는 신학적 담론의 추상성에 생동감을 부여해 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일 터입니다. 그 번역어는 다양할수록 좋고,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문학은 자폐적인 담론에 머물기 쉬운 신학을 열린 무대로 안내해 줄 수 있는 좋은 벗입니다. 신학은 문학에 초월적인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면 좋겠지요. 이처럼 문학과 신학의 상호수혈이 일어날 때 우리의 언어와 경험은 풍부해질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들은 ‘권위 있는’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 권위는 삶과 존재에서 풍겨나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배에서 혹은 발뒤꿈치에서 나온 말씀이기에 힘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말씀의 힘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은 화를 냈습니다. 설교자의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얼마나 공허합니까? 어쩌면 설교자는 자기가 선포한 말씀과 그의 삶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멀고도 고단한 여정입니다.

 

바츨라프 하벨은 “모든 말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 말해지는 상황, 그리고 말하는 이유 등을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꼭같은 말이 한 시점에서는 평화의 주춧돌이었다가, 다음 순간엔 그 음절 하나하나마다 기관총소리가 울려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말의 사용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말은 분명 악마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들의 말 속에 교활한 오만의 씨앗이 들어있지 않은지 늘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거번거한 말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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