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기도와 저항과 공동체 2009년 10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기도와 저항과 공동체

<<헨리 나웬의 평화의 영성>>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21쪽)

“저항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죽음의 세력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 그 결과 우리가 만나는 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생명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77쪽)

 

탈정치화된 영성이 판을 치는 시대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그 동료들이 미국 시민권 운동의 전환점으로 만든 셀마에서 진행된 영웅적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 남부로 내려갔다. 1970년대에는 반전집회에서 연설했고, 코네티컷의 트라이던트 핵잠수함 해군 기지에서 벌어진 철야 평화 집회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980년대에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니카라과와 과테말라에 가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레이건 대통령의 저강도 전쟁 전략과 핵무기 경쟁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네바다의 핵실험 장소에서 벌어진 항의 집회에도 참여했다. 그는 제1차 걸프전 전날인 1991년 1월 14일 저녁, 워싱턴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 앞에서 임박한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선택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는 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과 무기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구속과 투옥의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고 썼다.(11-13쪽에 나오는 존 디어 신부의 소개글 중에서)

 

이쯤 되면 우리 머리에는 즉시 ‘좌파’라는 말이 떠오른다. 불순분자,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자, 데모꾼…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얼굴로 알려졌다.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에 있는 라르슈 공동체에 들어가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다가 1996년 홀연히 세상을 떠난 영성신학의 대가, 헨리 나웬 신부가 바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헨리가 전해주는 라르슈 공동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헨리는 라르슈 공동체는 말이 아닌 몸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는 것은 먹이고 씻기고 어루만지고 붙들어주는 일이다. 그렇기에 라르슈에서 몸은 말이 수렴되는 자리이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육화를 온전히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아직도 나는 식탁을 차리고, 천천히 식사하고, 접시를 닦고, 다시 식탁을 차리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그래, 분명히 먹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먹은 후에 하는 일이다.’ 하고 생각한다.”(<<새벽으로 가는 길>>, 성바오로출판사, 1992, 193쪽)

 

이렇게 연약한 이들 속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이의 모습과,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에 자주 참여하는 실천가의 모습을 일치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생의 과정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그 두 가지 지향은 서로 길항하지 않는다. 그 두 가지 지향의 밑절미에는 예수가 있다. 백향목으로 상징되는 제국과 지배에 맞서 겨자풀의 나라를 가르쳤던 예수, 그에게는 신앙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불의와 폭력, 핵전쟁의 위협에 처한 인류의 미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평화의 영성이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았다. 영성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지만 대개는 탈정치적인 맥락에 국한되고 마는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헨리 나웬의 신앙적 실천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많다 하겠다.

 

평화 만들기-전적인 소명

<<헨리 나웬의 평화의 영성>>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처음으로 원자탄이 사용된 날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웬은 이 사건을 분기점으로 하여 평화를 만드는 일은 집단적 자살로부터 인류를 구해내는 과제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말한다. 히로시마 이후에 강대국들이 벌이고 있는 핵무기 경쟁은 평화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긴급하게 완수해야 할 과제임을 각인시켰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지출되는 군사비는 1조5천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이 지구상의 모든 생존 인물에게 거의 200달러씩 부담을 지우는 것”(반기문, <유엔의 모든 국민에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0월호)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이 ‘우리는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천명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웬은 그래서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며 꿈꾸는 모든 일들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하느님의 백성인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전적인full-time 소명”(22)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은 ‘평화’라는 말의 의미가 악마적으로 퇴색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현실감각이 없는 몽상가이거나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감추고 있는 사람 혹은 국가에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다. 냉전의 추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자행된 전쟁을 겪어오면서 우리는 전쟁과 폭력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내면화해왔다. 폭력이 정상이 되고 비폭력은 오히려 비정상이 되는 사회에서 매스컴은 시민 불복종운동이나 비폭력 행동을 추구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무기의 현대화나 군비확장을 통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힘의 신화는 너무나 강고하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다. 이런 도덕적 지적 허무주의가 암암리에 현대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종교조차도 권력의 패권에 투항한 채 평화를 만들어야 하는 본래적 직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 종교의 자기 배반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선뜻 평화운동에 뛰어드는 이들은 많지 않다. 나웬 자신도 동참을 꺼려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1960년대 반전 집회에서 드러난 집회 방식, 언어, 행동들은 반전 행동의 가치에 대해 회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화운동가들에게서 빠른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들어내는 조급증, 운동과정에서 겪게 되는 실패와 수모와 고통에 대한 미숙한 대처,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에 대한 분노나 혐오감 등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운동에 대해 유보해 온 강력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평화를,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통해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로 보는 것은 저항의 긴박성을 확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두렵고 화난 모습이다.”(108)

 

자기 속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평화를 이룰 수 없다. 평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전인격적인 변화이다. 평화운동이 영성운동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웬은 “평화를 만드는 일에 대한 성찰을 기도, 저항, 공동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33)하고 있다.

 

기도-평화를 주시는 분의 집으로 들어가기

“우리가 평화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먼저 평화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떠나 평화를 주시는 분의 집에 들어가야 한다.”(36-7)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거기서 사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말이나 행동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영향을 끼치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이끌린다. 상처받은 이에 대한 위로자의 역할을 할 때도, 굶주림과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돈과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관심의 중심에 놓곤 한다. 이러한 욕구는 숨겨진 상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하거나, 차별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융이 말하는 그림자(shadow) 혹은 콤플렉스는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그림자가 짙을수록 무의식의 보상작용은 강도를 더해가고, 자기중심성도 강화된다. 상처와 강화된 욕구의 악순환은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환경을 제공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상처와 욕구의 악순환을 떠나 새로운 거주지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를 존재로 부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의 활동이 기도에 바탕을 두지 않을 때 쉽게 두려움에 빠지게 되고, 모질게 되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기도야말로 평화실천의 기본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평화의 담지자가 될 수 없다. 나웬은 세상의 모든 파괴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항거는 핵무기나 압도적인 군사력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지배의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 즉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온갖 거짓된 안전이나 소속감을 벗어버리고, 모든 염려와 불안을 쫓아냄으로 지배의 환상을 타파하는 것이다.

 

"기도로 인해 우리는 전쟁 무기, 미사일, 잠수함이 있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진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음으로써 핵 절멸조차 우리를 파괴시킬 수 없다는 그런 진리를 우리의 것으로 가질 수 있게 된다…기도에서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소멸시킴으로써 모든 인간적 파괴의 기초를 무너뜨린다."(63-4)

 

죽음에 대한 ‘아니요’, 생명에 대한 ‘예’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세력에 대한 저항과 분리될 수 없다. 기도는 평화를 만드는 행동을 통해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저항이라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무질서와 혼란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개인의 주체성보다 공동체적 질서를 중시하는 우리의 문화적 특성도 이런 태도에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지향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현실에 대해 저항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저항이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아니요’인 동시에 모든 생명에 대한 ‘예’이다. 합법을 가장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을지도 모를 적의 공격을 사전에 대비하기 위해 ‘예방전쟁’을 정당화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신실한 신앙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핵전쟁의 위협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하면서 ‘현대판 아우슈비츠와 다하우스Dachaus’인 핵잠수함이나 전폭기에 망치질을 하는 사람들, 핵 수송 차량을 저지하는 사람들, 핵무기가 감춰진 시설의 담벼락을 뛰어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어떤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나웬은 “무저항은 우리를 핵 홀로코스트의 동조자로 만든다”(82)고 말한다.

 

국가의 법과 신의 법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 똑같은 정당성을 갖고 있는 합법적인 원리들이 갈등할 때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의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테바이의 지배자인 크레온은 국가에 대한 반역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앞에 두고 “아무도 그에게 장례를 베풀거나 애도하지 말고 새 떼와 개 떼의 밥이 되고 치욕스런 광경이 되도록 그의 시신을 묻히지 않은 채 내버려 두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하지만 오라비의 시신이 애도조차 없이 방치되어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안티고네는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다. 붙잡혀온 안티고네는 크레온에게 “나는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들을 죽게 마련인 한낱 인간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폴리스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크레온에게 중요한 것은 폴뤼네이케스의 행위인 반면, ‘신의 법’을 따르는 것이 ‘친족의 법’이라고 믿는 안티고네에게는 폴뤼네이케스의 존재 그 자체였다. 국가의 법을 따를 것인가, 신의 법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통치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그 답은 자명한 것이다. 폭력과 불의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라면 법을 위반하는 일도 행할 수 있다. 시민불복종운동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웬이 특별히 심각하게 직시하고 있는 것은 핵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인류이지만, 그의 시선은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는 핵전쟁을 가능케 하는 심성의 씨앗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미 뿌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료 인간에 대해 딱지를 붙이고, 범주로 나누고, 거리를 두는 행위 속에서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과 영화 그리고 현실 은 폭력과 파괴와 죽음이 결코 낯설지 않은 일상임을 자각케 한다. 이런 파괴적 문화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운동가들의 과제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죽음의 세력을 향한 ‘아니요’는 생명에 대한 ‘예’와 더불어 가야 한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명의 징조가 드러나는 모든 곳에서 이를 환기하고 긍정하며 키워 내는 것”(111)이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인인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柔弱勝剛强) 했다. 굳세고 강한 것을 숭상하는 세상에서는 생명에 대한 긍정조차도 죽음의 세력에 대한 저항이 된다. 나웬은 생명의 세 가지 측면을 ‘겸손, 자비, 기쁨’이라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겸손이란 “우리가 창조된 세계에 속한다는 것, 우리가 동료 인간 존재라는 것, 우리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는 것”(117)이다. 자비는 ‘문제 해결’ 중심의 태도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태도와 관련된다. 기쁨은 겸손과 자비의 열매로 주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저항은 비폭력적이다.

 

“그 평화는 우리의 적을 예속시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회심시킴으로써, 힘을 보여 줌으로써가 아니라 공동의 약함에 대한 고백을 나눔에 의해서,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근엄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냄으로서, 보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쪽 뺨을 내밂으로써,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145)

 

공동체-변화의 모체

평화를 만드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지속적이고 충실한 저항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공동체는 단순히 보호하는 역할 이상의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처음으로 현실화되는 곳이어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우리를 고립시키는 두려움의 장벽들을 지속적으로 허물면서 “고백과 용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드러나고 경축되는 약한 자들의 충실한 친교”(159)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지만 그러한 공동체는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요청 앞에 서곤 했다. 6세기의 성 베네딕토를 통해 수립된 공동체는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해 응답하고 중세 유럽에 새로운 사고와 삶의 양식을 제시했다. 13세기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중세 교회의 부와 타락에 대응하여 복음적인 삶을 지향하는 새로운 기풍을 수립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여러 공동체들은 르네상스 이후 시대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나웬의 대답은 단순명료하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까지도 멸절시킬 수 있는 시대, 집단적인 자살의 위협에 직면한 시대와 그 시대정신을 향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새로운 희망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분노와 욕망, 적대감 그리고 서로에 대한 폭력을 고백하며, 거듭해서 서로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베풀 때 그런 공동체는 자리잡기 시작한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신뢰하는 공동체라야 어둠의 세력에 진정으로 대항할 수 있다(188). 라르쉬 공동체를 세웠던 장 바니에 신부는 우리들 속에는 빛으로 변화되어야 할 어둠과 신뢰로 변해야 할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저항의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모체가 되어야 한다.

 

헨리 나웬의 이야기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의 글이 평화 운동에 동참했던 경험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기도와 저항과 공동체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평화영성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그는 제1차 걸프전 전날인 1991년 1월 14일 저녁, 워싱턴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 앞에서 임박한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선택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연설을 한 후에 존 디어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너무 쉽게 폭력에 의존하는 이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철저함을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점점 더 절감하고 있습니다.”(12)

 

평화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리고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야만 할 길이고, 걸어야만 할 길이다. 200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선정되었다. 조롱의 소리도 들려오고 우려의 소리도 들려온다. 노벨상 위원회는 핵무기 없는 세상에 대한 그의 비전, 군축, 무기통제협상과 기후 위기에 대처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화하려는 그의 지향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금 평화가 그만큼 위기에 처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지금 세상은 한국교회를 향해 권력의 패권에 투항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에게 시급한 과제는 교세확장이 아니라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헌신이고, 저항공동체로서의 야성회복이다. 탈정치화된 복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 시대의 저명한 영성신학자 헨리 나웬은 죽음을 향해 ‘아니요’라고 말하고 생명을 향해 ‘예’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이들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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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10 01-12 01:01)
기도, 저항, 공동체로서 살고자 다짐해봅니다. 공동체가 제일 절망적입니다. 나의 약함을 고백하고 나눌 공동체 말입니다. 어째뜬 겸손과 자비의 마음으로 농촌지역에 있는 교회를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애절함이 있어야 겠습니다. 화성시의 한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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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걸(10 01-12 06:01)
대학에 입학하고 첫 학기부터 품었던 의문, 회의들과 맥이 통하는 내용이군요. 학내 시위 현장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신학생'들의 저항방식이 여타 대학생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자기들의 주장만을 외치며 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는 모습에 크게 실망했거든요. 물론 학교측이나 절대 다수가 '목사님'인 교수님들의 대응방식 역시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구요. 그들 어느쪽에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신앙과 인생의 선/후배도, 스승과 제자간의 사랑과 존경도... 그들 어느 누구에게서도 평화를 찾을 수 없었죠. 제법 거창한 명분으로 시작해놓고 사흘도 못 가서 무엇 때문에 강의도, 시험도 거부한 채 시위하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시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걸 보면서 차라리 침묵하는 회색분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20년도 넘은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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