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산을 옮긴 사람 2009년 07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산을 옮긴 사람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버 렐린의 <<세 잔의 차>>

“발티 사람과 처음에 함께 차를 마실 때, 자네는 이방인일세. 두 번째로 차를 마실 때는 영예로운 손님이고. 세 번째로 차를 마시면 가족이 되지. 가족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네. 죽음도 마다하지 않아…세 잔의 차를 함께 마실 시간이 필요한 거야.”(219)

“전쟁이 벌어지면 기독교고, 유대교고, 이슬람교고 간에 지도자들이 ‘신은 우리 편’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신은 피난민과 미망인과 고아 편이에요.”(345)

 

<<세 잔의 차>>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을 때, 뉴스를 통해 한국의 여성 산악인 고미영 씨가 추락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히말라야의 8천 미터 이상의 고봉을 넘나들던 강철 여인이 결국 히말라야의 품에 안기고 만 것이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왜 굳이 그 위험한 산에 올랐냐고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삶을 구성해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나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다른 이들의 삶의 방식을 질타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위험한 산을 오르는 사람들, 아니 세상의 극지를 찾는 이들은 어쩌면 느른한 일상에 매여 하늘을 잊고 사는 이들에게 인간됨이 얼마나 장엄한 것인지를 상기시켜주는 이들이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삶의 지평을 확장시키라는 부름에 응답한 이들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산을 오른다. 물론 그 산은 우리 속에 있다.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칠층산도, 불교가 말하는 수미산도, 도교가 말하는 태산도 결국은 우리 마음이 이르러야 할 꼭대기일 터이니 말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꼭대기’라는 말을 ‘반드시’를 뜻하는 ‘꼭’과 ‘손을 대본다’는 ‘대기’가 합해진 말이라면서 “손을 꼭 대봐야 하는 곳, 그 곳이 꼭대기며, 꼭대기는 결국 진리가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길을 잃다

전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세 잔의 차>>는 산악인이었던 그레그 모텐슨의 새로운 등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오지에 여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일에 착수하게 된다. 그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이다. 그레그가 온 몸으로 살아낸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이는 저명한 언론인 데이비드 올리버 렐린이다. 경험의 직접성과 표현의 핍진성이 만나 잘 구어진 항아리 하나를 빚어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잠16:9)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이 구절에 고개를 끄덕이는 까닭은 이 잠언이 각자의 삶의 경험을 적실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삶은 야심차게 세웠던 계획의 좌절과 어긋남의 연속이 아니던가? K2 등정을 기획하고 있던 댄 마쥐르가 그레그에게 등반대의 의료담당자로 참여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선뜻 그 청에 응한 것은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상실감을 이기고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 살 때 걸린 뇌막염으로 간질에 시달리다가 결국 23세에 세상을 등지고 만 크리스타의 목걸이를 K2에 남겨두고 오겠다고 작정한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등정 도중, 조난당한 프랑스 등반대원들을 구조하느라 체력을 다 소진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하산길에 안내인을 잃고 방황하다가 발토르의 빙하지대를 벗어나 파키스탄의 오지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죽음의 고빗사위에서 그를 맞아준 것은 코르페 마을 사람들이었다.

 

마을의 촌장인 하지 알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어느 날 마을 아이들이 허허벌판 얼어붙은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학용품조차 없어 나무 막대기로 흙에 글자를 쓰는 아이들, 하루 1달러가 없어서 교사를 고용할 수 없는 마을의 형편을 듣고는 깊은 충격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다. 생활의 모든 것이 투쟁일 수밖에 없는 오지마을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레그는 아주 간단한 일조차 힘들게 해야 했던 동생 크리스타의 존재를 떠올린다. 그는 무엇이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 알리에게 학교를 지어주겠다는 무모한 약속을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퇴근 이후 시간 혹은 비번인 날 방송국 앵커와 진행자들을 비롯한 많은 유명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등반가로서의 자기 이력을 소개한 후 왜 코르페에 학교를 세울 결심을 했는지를 밝히면서 동참을 호소했다. 학교 설립 자금을 모으는 동안 그는 차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수도승처럼 살았다. 580통의 편지를 썼지만 그레그는 6개월이나 지나서 100 달러짜리 수표를 동봉한 처음이자 마지막 답장을 받았다.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가서 어린이들에게 자기가 하려는 일을 설명하자, 아이들은 즉각 응답했다. 그들은 1센트 성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623달러 45센트를 보내주었다. 필요한 1만 2천 달러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액수였지만, 아이들이 보내온 그 성금은 코르페에 학교를 세운다는 꿈이 헛된 망상이 아님을 그에게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기적처럼 물리학자이자 산악인이었던 수억 달러의 재산가 장 회르니를 통해 필요한 금액을 확보했다.

 

파키스탄으로 돌아간 그는 설계 도면을 만들고, 자재를 사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카라코람 도로를 통해 그 자재를 운반했다. 다리를 지키던 탈레반 병사들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우여곡절 끝에 코르페에 도착했다. 하지만 난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학교를 짓기 전에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돌다리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했다.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새롭게 모금활동을 해야 했다. 절벽 앞에 선 듯 암담했다. 하지만 K2 등정에 성공했던 그의 영웅 라 루이하르트의 말이 큰 격려가 되었다. 실패는 단지 과속방지턱 몇 개에 걸린 것일 뿐이라는.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코르페 학교 설립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갔던 페어몬트 호텔 무도회장에서 만난 타라 비숍이었다. 그들은 만난 지 엿새 만에 혼인서약을 하고 부부가 되었다. 타라가 가져온 행운이었을까? 그레그의 진심을 알아차린 장 회르니는 중앙아시아협회를 설립하여 매년 파키스탄에 학교 하나씩을 세우자며 그레그를 설득한다. 뜻밖의 제안에 고무된 그레그는 코르페로 돌아와 학교 건물을 짓는 일에 박차를 가한다. 능력 있는 인부들을 구하고, 관리인들도 채용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운 듯이 보였다. 하지만 공사는 그가 원하는 만큼 진척되지 않았다. 그가 엄격한 공사감독관이 되어 안달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하지 알리가 그에게 산책을 가자고 말한다. 마을에서 꽤 떨어진 산에 올라가서 하지 알리는 말한다. “이 산들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네. 우리도 그렇고. 산들에게 뭘 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는 게야. 산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지.” 그러면서 하지 알리는 세 잔의 차를 나누어 마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 잔의 차를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이방인과 손님을 넘어 가족이 되었음을 뜻한다. 하지 알리는 학교를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를 맺는 일임을 넌지시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인간관계가 시혜자와 수혜자로 수직화되는 순간 관계의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배와 복종의 위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하여’라는 말이 때로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여성을 깨우다

코르페에 학교를 지어주겠다는 약속이 결실을 거두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레그는 다른 오지 마을에도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참 많은 난관에 직면한다. 그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탈레반에 납치당하기도 하고, 여자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걸 반대하는 이슬람 지도자의 파트와(종교 지도자가 내리는 종교적 판결) 선언으로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그레그는 학교 지을 토지와 노동력을 기부할 용의가 있는 마을을 물색하는 일을 현지인들에게 위임한다. 이후 그는 학교를 지을 때마다 전혀 낯선 곳에서 우왕좌왕하는 대신 “마을에서 마을로, 계곡에서 계곡으로 이미 관계를 맺은 곳으로 천천히 확대해”(259) 나갔다. 낙후된 지역을 개발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죽음에 직면하여 중앙아시아협회 앞으로 100만 달러를 남긴 장 회르니의 기금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는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뿐만 아니라, 포터로 살아가는 발티족 사람들에게 등산 훈련을 시키기 위한 카라코람 포터 훈련소도 세우고 환경 협회도 설립한다. 위생 시설과 깨끗한 식수 부족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공용 수도를 설치하고, 탈레반을 피해 나온 이들을 수용한 난민 캠프에 있는 4천 명의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 80명을 보내주기도 한다. 그가 특히 여성 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여성들이야말로 그 지역과 문화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주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금이 떨어지자 그는 모금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기금을 조성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기금 모금에 관한 책을 쓴 조안 플래너건은 “그냥 기부금을 내주십사 부탁하라”고 말한다. “당신의 요구가 적절하다면 그에 대해 호응이 뒤따를 것이고 아마도 올해 안에 아니면 내년 안으로 필요한 기금이 마련될 것이다.” 대단한 낙관주의 아닌가. 그는 기금 모금이 주는 선물에 대해서도 말한다. “당신은 풀뿌리 기금모금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남은 생애에 좋은 기억거리가 될 것이다.”(조안 플래너건, <<모금은 모험?>>, 아르케, 2002, 10쪽) 그레그의 경험은 이 말이 진실임을 입증해준다. 매스컴을 통해 그의 활동이 알려지고, 그는 테러범들의 온상인 파키스탄의 산악지방 외딴 마을들에 학교를 짓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는 적절한 교육이야말로 테러에 대한 가장 좋은 대비책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러한가?

 

시인의 용도

전쟁과 테러와 빈곤과 분쟁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시인의 용도’를 묻던 시인 마종기가 떠오른다. 그의 질문은 세상을 변혁시키지 못하는 시의 무력함에 대한 자조인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정현종은 상상력의 힘으로 세계질서의 전복을 꿈꾼다. 그는 <요격시>를 통해 다른 무기가 없어 마음을 발사한다고 말한다. 모든 미사일에는 두루미를, 모든 폭탄에는 기러기를, 모든 전폭기에는 도요새를, 모든 포탄에는 굴뚝새를, 무기 공장에는 뻐꾸기를 쏘아올리겠다는 것이다. 허탈하지 않은가? ‘시인이란 참!’ 하고 웃고 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꿈조차 없다면 이 각박한 세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상상력(imagination)은 시인들이, 아니 몽상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그리는 이미지(image)의 나라(nation)이지만, 이 나라의 꿈이 우리를 현실 속에 가라앉지 않도록 해주지 않던가.

 

걸프 만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거액의 오일 머니가 파키스탄에서 가장 활발하게 과격파를 길러내는 와하브파 마드라사(이슬람의 교육기관)를 짓는 데 쓰인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며 그레그의 마음은 바빠진다. 그 학교들은 가난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호전적인 지하드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활동의 지평을 아프가니스탄까지 확장한다. 평화의 적은 무지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그레그가 한 말은 우리가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

 

“테러가 발생하는 건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데서 몇몇 사람들이 어느 날 별안간 우리를 미워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할 만큼 밝은 미래가 아이들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419)

 

“오사마를 만들어낸 건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바시르의 말은 다소 과격한 듯하지만 진실에 근접해 있다. 그는 미국과 세계가 싸워야 할 적은 무지라면서, 무지를 무찌를 수 있는 방법은 그들과 “관계를 맺고 교육과 비즈니스를 통해 현대 세계로 데리고 나오는 것뿐”(444)이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이슬람의 과격파들 속에 도사린 무지만이 아니다. 모든 근본주의는 다 위험하다. 그들은 ‘우리’와 ‘그들’을 철저히 가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우리’는 옳고 ‘그들’은 그르다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적이 되는 것이다. 다른 종교나 문화를 악마시하고,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죄의식을 주입하고, 사람들 속에 십자군적 정신을 심어주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위험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04년 남아시아를 강타했던 쓰나미는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가르치고,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즈를 휩쓸었던 허리케인 카타리나는 게이 문화에 대한 심판이라고 가르치는 종교인들이 있었다. 그릇된 종교적 확신은 이처럼 무지하고 몽매하다.

 

산을 옮기는 사람

그레그 모텐슨은 지금까지 87 군데가 넘는 오지 마을에 학교를 설립했다. 공저자인 데이비드 올리버 렐린은 “그는 혼자 힘으로 수만 명의 어린이들의 삶을 바꾸었고 이 지역을 뒤덮는 미국의 공식 선전 활동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했다.”(13)며 그레그의 업적을 치하한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의 여행 담장 기자 존 플린은 그레그의 이야기를 간략히 요약한 후에 “겨우 한 사람의 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의심이 들면 그의 이야기를 생각하자”(331)고 말한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앙이 아니라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체념이라지 않던가.

 

그레그 모텐슨과 같이 산에서 조난당했던 사람, 또 오지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경험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레그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삶은 어떤 의미에서 운명이다. 그런데 그 운명은 우연이 아니라 준비된 운명이다. 그의 아버지 어빈 모텐슨은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탄자니아 최초의 수련 병원인 킬리만자로 기독교 의료센터를 설립했고, 어머니는 국제학교를 설립했다. 어린 시절을 탄자니아에서 보낸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숭고한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득했다. 나중에 위생병으로 군에 입대해서 베트남 전 이후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돕고, 흑인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 그의 가슴에 심어진 인도주의적인 정신 때문일 것이다. 심는 이가 있으면 거두는 이가 있는 법이다.

 

K2 등정에는 실패했지만, 에움길을 통해 그는 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산을 옮기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야기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이 조금의 과장도 아닌 진실일 수 있음을 증언한다. 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해 그가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산을 옮기는 일이었다. 그의 꿈과 열정은 돌을 학교로 바꿔냈고,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는 사람들 손에 성경을 들려주지도 않았고,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믿음을 권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세 잔의 차를 나눈 사람으로서 현지인들의 가족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꼭대기에 당도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등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 세계와의 만남이 필연이 된 오늘, 교회가 그들에게 내밀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세 잔의 차>>는 이런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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