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 2009년 06월 06일
작성자 김기석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

이영표, 이승국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고 지쳐서 혹은 정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고 싶다면, 혹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지금 성공을 향해 잘 가고 있는 거라고. 원래 성공을 향해 가는 길이 바로 그 길이라고. 실패와 절망감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서만 너희가 원하는 그곳에 갈 수 있다고.”(82)

 

'초롱이'라는 별칭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축구선수 이영표가 자기 삶의 내력과 생각을 털어놨다. 지금도 현역선수인 그가 이렇게 서둘러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애초에 책을 출간하겠다는 생각은 그에게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출판사의 거듭되는 요청과, 책을 펴내는 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어느 목사의 말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 책은 그 자신이 집필한 것은 아니다.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24살의 젊은이 이승국 씨가 이영표의 런던 집에 일주일여를 머물며 기록하고 녹음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집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이영표와 이승국의 공동 저작인 셈이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 혹은 자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준다는 것은 이미 준비되고 정리되어 있는 정보를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나 대화는 파트너가 있거나 상정한다. 글쓰기는 가상의 독자들(그 자신이 독자가 될 수도 있다)을 염두하게 마련이고, 대화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발화행위이니 말이다. 글쓰기 혹은 대화는 자기 발견의 험로이고, 타인과의 소통을 향한 고단한 여정이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대화는 상대가 던진 질문 앞에 자기를 개방해가는 과정이니 말이다. 그 과정을 통해 글쓴이/대화자는 자기가 겪어온 삶의 다양한 계기들을 톺아보며 그 일들의 의미를 묻거나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가 부여된 그 일들은 비로소 '겪은' 사건이 아니라 '만난' 사건이 되고, 결국에는 잊을 수 없는 삶의 계기가 되어 자기 삶을 새롭게 축조하는 바탕이 된다.

 

과골삼천踝骨三穿

강원도 홍천의 산골소년이었던 이영표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안양으로 전학을 하면서 일종의 문화충격을 겪는다. 그때 처음으로 바나나를 보았고, 한 학년에 두 반이 있다는 사실과 채소를 돈 주고 사먹는 것을 보고 놀란다. 달리기를 잘하던 산골소년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에 발을 들여놓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축구를 그만두려 했다. 맞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빠지면 다른 선수들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중학교 코치의 으름장에 결국 안양중학교에 진학하고, 그때부터 개인운동을 하겠다고 작정한다. 그 운동이 대학 4학년까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거름 없이 지속되었다니 놀랄 일이다. 친구들이 따뜻한 숙소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시간에도, 친구들이 텔레비전에 빠져드는 저녁 시간에도 그의 개인훈련은 지속되었다. 그 이유를 이영표는 "노력의 결과보다는 노력 자체가 나에게 주는 즐거움을 알고 있었으니까"(59)라고 말한다. 프랑스 화가인 가바르니(1804-1866)는 ‘반드시 하루에 선(線) 하나라도’라는 구절을 삶의 모토로 삼았다 한다.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황상은 70이 넘어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메모해가며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그 나이에 어디에 쓰려고 그리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고 비웃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우리 선생님은 귀양지에서 20년을 계시면서 날마다 저술에만 힘써 과골, 즉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다. 선생님께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친히 가르쳐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런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정민, <<스승의 옥편>>, 마음산책, 2007, 21쪽)

 

과골삼천(踝骨三穿)의 다짐이 이영표에게도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그런 지극정성의 결과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 그는 대학교 3학년 무렵 엄청난 좌절을 겪는다. 건국대 재학 시절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도 그는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품는다. 편하게 쉬면서 축구를 하는 친구들에 비해 그는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축구는 열심히 한다고 잘 되는 게 아니라,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허탈감과 자신에 대한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 연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세찬 바람 앞에서 그는 '버티기만 하자. 다른 생각하지 말자', '뒤로 밀리지만 말자, 여기서 이 바람을 견뎌내기만 하면 된다'며 스스로를 다잡는다(79). 일종의 마음공부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옛 사람은 무엇이든 기초를 닦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지킬 수 있는 계율을 정해놓고 그것을 끊임없이 지켜가야 한다(持戒)고 말했다. 물론 그 과정은 온갖 어려움과 모욕을 참고 견디는 일(忍辱)과 꾸준함(精進)이 요구된다. 바위 같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인데 그렇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 바위를 뚫으려고 할 때 기적은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바위가 터지고 샘물이 솟아나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이치가 다 같은 것인가? 이영표는 운동을 통해 그 이치를 깨친 셈이다. 그는 그 힘겨웠던 시간을 '누에가 나방이 되려는 순간'(81)이라고 표현했다. 그 인욕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마침내 올림픽 대표로, 곧 이어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마침내 세상 앞에 '초롱이'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 입문

이영표 하면 떠올리는 게 기독교신앙이다. 골을 넣은 후 혹은 게임이 끝난 후 그는 녹색의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린다. 굳이 자신의 신앙을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영표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프로에 입단한 이후이다. 그전까지 그는 '믿지 말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살았다. 어린 시절 그의 눈에 비친 신자들의 모습이 반면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살까?' 하는 게 늘 의문이었다(115). 신앙생활을 권유하는 친구들에게는 빨리 믿음을 포기하라고 권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여러 가지 함정 질문을 던져 그들을 당혹케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마음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저 친구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 이야기를 할까? 하나님이 과연 있을까?' 가장 원초적이고 소박한 질문 앞에서 그의 인식은 한계에 이르렀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서술할 수 없다는 '당혹감'은 어쩌면 스스로 자명하다고 받아들였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답을 얻기 위해 그는 아직은 믿지 못하는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신비한 일을 보여주든지, 자기 마음을 바꿔보라는 것이었다.

 

질문은 인식주체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것이지만, 일단 떠오르는 순간 사유주체는 그 질문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우연한 기회에 배달된 신앙서적을 읽고, 교회 성경공부에도 참여하게 되면서 그는 매우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에 입문하게 된다. 그 소박하고 원초적인 질문이 떠오른 순간이야말로 그가 불가지론의 문지방을 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증명할 수 있다거나 보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시작하니까 보이더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하지 않고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일단 문지방을 넘어서자 그의 일상은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일들로 채워진다.

 

그는 2002년 월드컵 직전에 훈련하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근육이 12센티미터쯤 찢어진 것이다. 의사들은 6주 동안 못 움직이고 3개월은 있어야 운동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 진단했다. 월드컵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릴 수 있기를 소망했던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 <욥기>를 읽다가 자기 마음 깊은 곳을 보게 된다. "주님을 위한 월드컵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는데 월드컵이 가까워 올수록 내 마음속엔 '잘해서 인정받아야지, 월드컵 잘해서 유럽 가야지.' 이런 마음이 숨겨져 있었던 것"(135)이다. 월드컵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그에게 찾아온 것은 큰 평안과 기쁨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는 부상으로부터 회복되어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영표는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더딘 것 같고, 또 '우연을 가장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으면서도 현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믿음의 언어는 보편적이라기보다는 고백적이다. 믿음의 언어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보다 유치한 일은 없다. 물론 분별력조차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믿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은 서로 다른 인식의 지평에 서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이영표는 자신이 바라고 열망하고 계획한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말한다.

 

“잘 보면 인생도 그래. 어떻게 보면 빨라 보이고 어떻게 가면 느려 보이고 하는데,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길로 가느냐 안 가느냐야.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길이 제일 빠르거든.”(167)

 

이런 생각 때문일까? 그의 행적은 때로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인 AS로마로의 이적파동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좋은 기회였기에 그는 가기로 작정했지만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치열하게 묻던 그는 로마행을 포기할까 생각하는 순간 마음에 찾아든 평안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확신이 없거나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울 때 상황을 주님께 맡기고 그 결과를 기다릴 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 결정의 이유를 아는 걸 뜻하진 않지만. 그는 비합리적인 확신에 근거한 결정이라 해도 잃어버릴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직관을 통해 세심하게 깨달았던 것일까? 자칫하면 이런 태도는 광신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신앙이란 이성이나 지성의 포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신앙은 늘 주체적인 면(fides qua creditur)과 객체적인 면(fides quae creditur)이 결합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마련이다. 진실한 믿음이란 자신이 믿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의존하여 사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순간, 그는 자기 삶의 연출자인 동시에 수행자가 된다. 마음의 소리를 경청하기보다는 늘 외부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에게 이영표의 선택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성공과 실패 사이

이영표가 꿈을 갖는 게 꿈이라는 대담자 이승국에게 주는 선배로서의 조언은 귀담아들을만하다. 그는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성공과 실패의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지만, 그것은 그다지 믿음직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실패자도 있고, 실패한 성공자도 있다. 쓰라린 실패를 디딤돌 삼아 더 큰 삶의 지평을 내다보는 이들도 있지만, 작은 성공의 경험으로 인해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도 있으니 말이다.

 

“지나온 나의 길을 돌아보면 신기하게도 늘 실패의 연속이었어. 난 실패했을 때마다 다시 일어섰을 뿐인데, 어느덧 내가 어렸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이루었지.”(221)

 

그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이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칭찬과 비난을 가려들으려 하는 것은, 그런 평가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동요가 가라앉은 후에야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차라리 힘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당연한 일이니까 받아들여야 한다. 불평 없이 고통을 견디는 태도는 그렇게 길러진 것이다. 그는 믿음이 현실을 바꾸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득한 것 같다. 믿음은 사실 삶의 주체인 나를 바꾸어 놓을 뿐이 아니던가. 현실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면 현실도 달라진다. 이것이 신앙의 연금술이다. 생의 문제는 객관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다. 그것은 의미를 빚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운동선수들의 정신력에 대해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흔히 정신력하면 한 걸음도 더 뛸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일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영표에게 있어 정신력은 경기장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정신력은 경기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신감을 늘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야. 강자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약자를 쉽게 생각하지 않는 거지. 또 경기장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고 경기장 밖에서 절제된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끝없는 노력과 성실함도 넓은 의미에서는 정신력이라고 볼 수 있지.”(284)

 

끝없이 노력하고,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 '초롱이' 이영표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크게 갈등하는 법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이 마음을 지배하면 정말로 중요한 일은 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자기와의 불화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성격이 그의 운명”이라 했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가야 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분명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하다.

 

물론 그의 이야기에는 잔혹한 현실, 혹은 신의 침묵 속에서 절망하는 인류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다. 세상에는 빛으로 환원되지 않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있음도 사실이 아니던가. 세상에는 '당위'를 비껴가는 일들이 너무 많다. 각자의 하나님 체험은 소중하지만, 그것을 보편화하려는 욕망은 위험하다. 사람마다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다름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영롱함이 세상을 밝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202)는 그의 말이 울울한 시대를 살아내는 젊은이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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