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작은 샘이 된 소셜 디자이너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작은 샘이 된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지승호의 <<희망을 심다>>

 

“인생이라는 게 언제나 도전이고, 모험이고, 위험과 시행착오의 가능성은 늘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수를 너무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면 그 시대는 위기에 처하고, 정체에 빠진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이 철밥통 직장을 원하는 사회는 미래의 비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392쪽)

“박원순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도그마화된 진보와 욕망의 딱정이로 변한 보수 사이에서, 그것을 둘 다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인, 정치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지승호, 423)

 

유쾌한 호민

그리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마라톤 전투에서 죽어간 전몰자들을 위한 국장이 어떻게 거행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우선 천막을 치고, 죽은 자의 뼈를 그곳에 안치하여 애도의 기간을 갖게 하고, 친지들은 제각기 제물을 마련하여 사흘 째 되는 날 묘지로 행진을 했다. 시민이건 외인이건 희망자가 뼈가 담긴 삼나무 관을 실은 수레를 끌었고, 친척 여자들은 곡성을 내며 그 행렬을 따랐다. 행방불명자를 위해 덮개가 씌워진 빈 수레도 한 대 준비되었다. 시의 외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있던 국립묘지에 뼈를 묻고, 흙을 덮고 나면 시가 지명한 식견이 높은 사람이 전몰자에게 어울리는 찬사를 바쳤다. 그해의 연설자는 페리클레스였다. 그는 국장 연설을 통해 그리스 시민들이 추구했던 자유의 본질과, 그 자유를 지키는데 필요한 시민적 용기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라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의 마땅한 의무라고 말한다. 타인의 규제 아래 있지 않으면서, 스스로 폴리스를 구성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시민이라는 것이다.

 

“전사(戰士)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촉진시킵니다. 비판이 실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판으로만 흘러 해야 할 행동을 소홀히 하는 일도 없습니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 범우사, 175쪽)

 

각각의 주체들이 건전한 소통과 참여를 통해 자기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 논의하고 또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협력할 때, 개인이 사사로운 욕망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리고 보편성을 향해 자기를 개방할 때 개인과 세상은 함께 자란다. 조선의 풍운아 허균의 분류대로 세상에는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이 늘 힘 있는 자들의 수탈을 당하면서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원민(怨民)과, 세상을 바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지배층의 논리를 합일화하고 살아가는 항민(恒民)이 많지만, 정체성이 분명하고 역사에 대한 지향도 분명해 기회를 보아 사회개혁에 나서는 호민(豪民)도 있는 법이다. “좀 더 인간적인 사회가 된다는 것은 그게 설사 소수라 해도 정말 억울하게 과거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128)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 투신하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명함에 직함을 대신해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고 적고, 변호사라는 호칭보다는 ‘원순씨’로 혹은 ‘작지만 멀리 나는 넓적부리도요’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는 분류하자면 강박적인 데가 없는 호민, 유쾌하고 따뜻하지만 지향해야 할 세상을 향해 지칠 줄 모르고 내달리는 호민이다.

 

그는 유목적 지식인이다. 어느 한 군데 머물지 않고 흐름 속에 있는 시대의 요구에 창조적으로 응답하고 있다. 곁눈질로나마 그의 삶을 살펴본다는 것은 그의 희망 만들기, 혹은 희망 심기에 물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희망을 심다>>는 알마출판사가 ‘동시대인의 소통’이라는 주제로 기획하고 있는 인터뷰 형식의 책 시리즈 중 두 번째 책이다.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와의 대화는 시종 유쾌하면서도 진지하다. 아직 삶의 한 복판이라 여길 수 있는 시점에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선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는 계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삶을 사회적 자산으로 내놓는 행위이기도 하다. 경남 창영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로 성장하기까지 박원순이 걸어온 삶의 길을 되짚어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상적 삶의 흐름에 충격을 가해 자신의 삶을 추스르도록 하는 계기가 있다. 부모와 누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장난꾸러기로 살아가던 박원순은 홍수에 쓰러진 볏단을 세우느라 종일 물속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무력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때가 중학교 1,2학년 무렵이었다. 전지전능한 존재로 생각했던 아버지도 약한 존재라는 자각을 갖는 순간이야말로 정신적 탯줄이 잘려나간 순간이었다. 그 경험은 일종의 입문의식(initiation)이 되어 그로 하여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들고 이 결심은 평생 유지된다. 경기고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할 때 독서실에 머물면서 3개월 동안 양말조차 벗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다는 에피소드나, 교과서는 물론이고 문제집까지 다 외워버렸다는 고백은 그가 의지의 사람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의 심성의 바탕을 형성해 준 것은 하루에도 스무남은 명이나 찾아오는 거지들을 박대한 적이 없었던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아무리 어려워도 동네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던 마을 공동체의 상호부조에 대한 기억이다. 그가 지금도 마을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 세상 변혁의 한 축이라고 믿는 것은 그런 기억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부름을 받다

그의 일생의 방향을 틀지워주고, 인생의 경계를 확장시켜 준 것은 대학 새내기 김상진 열사 추모집회에 참석했다가 구속되어 경험한 4개월 동안의 수감생활일 것이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수감생활을 통해 ‘신 없이 신 앞에’ 서는 성숙한 시대의 신앙과 만났던 것처럼, 신영복 교수가 수감생활을 통해 창백한 지식인의 삶의 경계를 넘어 민중의 삶과 만났던 것처럼, 박원순도 수감생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가까이서 만나 삶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인생 막장이라는 감옥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 시기에 그 사람들과 함께 살아봤다는 것이 저한테는 큰 공부가 됐죠. 가장 밑바닥까지 닿아 있는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됐고, 그럴 수 있는 자신감이나 여유를 가지게 됐어요. 제겐 엄청난 경험이고, 면학의 공간이기도 했죠.”(76)

 

감옥생활이 있었기에 그는 사회적 타자로 도외시되고 있던 계층의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교류하면서 살아가는 실천적 지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옥에서 읽었던 독일의 법철학자인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책머리에 나오는 “법은 목적은 평화고, 거기에 이르는 길은 투쟁”이라는 말은 사회변혁을 꿈꾸던 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나중에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하여 강원도 정선등기소장으로 일했던 체험 또한 그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좋은 계기였다. 군 단위 기관장들과 교류하면서 공무원들이 위로부터 내려온 지시를 어떻게 전달하고 또 처리하는지를 가까이서 지켜본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1979년에 고시에 합격한 그는 사회를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검사로 임관되지만 사람들의 잘못을 캐고 벌을 주어야 하는 검사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조직의 논리에 순응하면서 기능주의적으로 검사직을 수행하기에는 지나치게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검사 옷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광고에 “내 학문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문구를 넣은 것만 보아도 그가 추구하는 삶의 지향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세상에는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지는 만남도 있지만, 우리 삶에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남, 사건이 되는 만남(encounter)이 있다. 박원순에게는 조영래 변호사와의 만남이 그런 것이었다. 그와 함께 망원동수재사건, 구로동맹파업사건, 부천서성고문사건 등을 맡으면서 박원순은 확고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는 조 변호사를 통해 세상을 읽는 눈과, 사회 변혁의 방법론을 배운다. 그는 깊은 사회적 통찰력으로 세상을 보면서 법률을 통해서 사회적 어젠다들을 만들어내는 조 변호사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한다. 이를테면 망원동수재사건도 평범한 천재지변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조변호사의 눈에는 그것이 서울시와 시공업자인 현대건설이 만들어낸 인재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판결을 얻어낸다. 박원순이 이후에 참여연대 활동을 통해 펼친 모든 공익사업의 뿌리에는 이 경험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또 조 변호사에게서 사회의 문제들을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적 세력을 연대시키면서 풀어가는 지혜를 배운다. 그는 변화를 위한 지혜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속에 이미 다 있다고 믿는다. 그가 지금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일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다. 그가 조 변호사에게서 배운 것을 한 가지 더 지적한다면 그것은 집요함과 끈기이다. 사실 배웠다기보다는 그게 그의 천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는 발로 뛰고,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기록하는 정력적인 활동가이다. 의미 없는 기록은 없다는 게 지론이기에 그는 웬만한 것은 모두 다 공적 기록으로 남기라고 권한다. 한 시대의 한 과제를, 한 사건을 정리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 일은 반복되게 마련이다(397쪽). 변호사로서 가장 분주하던 시기에도 변론서를 쓴 까닭은 국민과 역사를 향해서 피고인들의 진실과 변호인들의 주장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저술한 책들은 그런 기록과 치열한 자료 수집의 결과물들이다.

 

시민운동가의 길로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우리가 어떤 박제화된 이념을 갖는 순간 도그마에 빠지고, 심지어는 우리가 비판했던 체제적 모순이나 잘못을 우리도 함께 가지는 게 아닌가”(163) 하는 절박함에서 떠난 영국과 미국 유학은 그를 시민운동이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했다. 변호사의 직무를 통해 억울한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던 그는 이제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제도적 이니셔티브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참여연대를 만든다. ‘법치주의’, ‘투명성과 책임성’, ‘시민의 참여’를 화두로 삼아 그는 낙선낙천운동, 재벌개혁운동, 반부패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을 벌이고, 부패방지법,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정보공개법 등의 입법을 추동한다. 그의 그런 실천은 버나드 브랜든 스캇의 표현을 빌자면 ‘세상 다시 그리기’(re-imagine the world)인 셈이다. 기존 질서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그려 보인 예수처럼 그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그 벅찬 변혁의 길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대통령이나 장관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세운 정책을 실천하는 면 서기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미세해져야 합니다. 큰 틀에서 패기만만한 것도 중요하지만 미세한 부분을 그려내고, 고려하고, 설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200)

 

거대담론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박원순이 제시하는 길은 개량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선명한 ‘선언’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운동은 언제나 마이너리티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지만, 계속 마이너리티로만 머무르면 곤란한 것이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에 찬성한 사람들을 운동으로 끌어들이고 조직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가 시민운동의 주역으로 주부, 은퇴한 장년층, 청년 실업자를 지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참여연대의 활동이 어느 정도 자립적인 기반을 갖게 되자 그는 참여연대를 떠나 새로운 일을 모색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생의 현장을 떠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아서 금단증상과도 같은 내홍을 겪었지만 그는 결국 새로운 틈을 찾아냈다. 그것이 ‘아름다운 재단’과 ‘아름다운 가게’이다. 외형적인 근대화는 이루었지만 정신의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우리 사회를 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그는 ‘나눔’의 생활화에서 찾은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나눔이 생활의 한 부분이 되는 사회를 꿈꾼다. 나눔이 ‘습관이 되고, 문화가 되고, 생활이’(281쪽) 되는 사회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인간적인 사회이고 성숙한 사회이다. 그는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1퍼센트나눔운동과 아름다운 가게를 제안한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헌옷이나 물건을 재활용하자는 제안처럼 보이지만 삶의 가치를 외양이 아니라 내실에 두자는 제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철학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문학적인 지식, 정보,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원칙’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에서 기부문화가 발달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한다. 그건 비단 기부문화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행복감을 느끼려는 이 시대의 천박한 풍토는 자기 나름의 주체적인 기준과 인생의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자유인으로 키워가는 정신 활동을 교양의 습득이라 한다면 공공적 지식인의 과제는 우리 시대의 교양 수준을 높이는 일일 것이다.

 

봄을 가져오는 사람

그가 이렇게 시민운동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낙관적 이해 덕분일 것이다. 사회의 밑바닥을 보았던 그가 인간의 부정성을 모를 리는 없다. 하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해지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가 ‘모금’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인간 이해를 기초로 해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보편성에 대한 굳은 신념과 신뢰’(285쪽)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그 자신의 따뜻함은 다른 이들의 심성 속에 깃든 따뜻함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는 것이다. 그는 철저한 실천가이지만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들거나 도덕적인 열패감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그의 실천이 강박적이지 않은 것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는 그의 열린 태도 때문일 것이다.

 

박원순이 지금 몸담고 있는 희망제작소는 “한 사회의 어젠다, 과제들에 대해서 민첩하게 캐치해내고, 그것을 사회에 공급하고, 일부 실천하는 전문기관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322쪽)에서 조직된 모임이다. 새로운 변혁의 과제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콘텐츠로 만들어내고, 거기에 필요한 사람들을 훈련하는 일까지도 그는 자기의 사명으로 여긴다. 그는 정치가와 시민운동가에게 필요한 자질로 강한 호기심, 절박한 심정, 누구의 말이라도 듣고자 하는 순수함, 겸손함과 열정(350쪽)을 들고 있다. 이런 덕목들은 사실 사람들이 그에게서 발견하는 덕목과 오롯이 일치한다.

 

시인 김지하는 '새일은 늘/틈에서 벌어진다'면서, '갇힌 삶에도/봄 오는 것은/빈 틈 때문'이라 했다. 그의 말을 빌자면 박원순은 우리 사회에 봄을 가져 오는 사람, '빈 틈' 찾기의 달인이라 할 수 있겠다. 또 한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길을 찾아내는 그에게 세속적 예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해도 과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공을 이룬 후에는 머물지 않는다'(功成而不居)는 성인의 태도를 내면화한 듯한 그의 모습은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는 종교지도자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좋겠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포가 자기만족적 담론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지향점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미세한 실천의 길을 모색하는 박원순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종교, 공동체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는 살아있다 말할 수 없다. 박원순은 작은 샘 하나가 큰 웅덩이의 물을 깨끗하게 유지시켜 주는 힘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물이 다 깨끗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맑은 샘물 하나가 있으면 세상을 많이 바꿀 수 있다(414)는 신념 하나로 그는 이미 샘물이 되었다. 오늘도 내일도 이 척박한 인간의 대지에 희망을 심는 사람을 바라보며 대지의 주인이신 그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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