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타자'는 없다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타자’는 없다

존 하워드 그리핀의 <블랙 라이크 미>

 

“<<블랙 라이크 미>>에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한 인간을 판단할 때 인간성 면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의 피부색이나 철학적으로 ‘우연한 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미친 상황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363)

“우리와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지가 오늘날 종교적 상상에 주어진 커다란 과제이다.”(조너선 색스)

 

낯선 나와의 대면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로 규정한다. 사람은 자신이 만들지 않은 세상, 즉 주어진 세상에 태어나 살도록 조건지워진 존재이다. 그 세계는 또한 타자들과 더불어 공유하는 세계이다. 또한 나의 현존재는 타자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구성된다. 그렇기에 만남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자아 바깥에 있는 타자 혹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우리 삶의 빛깔을 결정한다. 우리는 자아의 외부 세계를 적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친근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낯익은 것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눈길을 던지지만, 낯선 것에 대해서는 차가운 눈길을 던지기 쉽다. 에덴 이후의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앞에 현전한 존재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익숙함이 주는 삶의 안온함을 원하기에 그런 공동체를 만들며 산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순간 경계 짓기가 시작된다. 경계 짓기의 기본은 ‘우리’와 ‘그들’의 가름이다. 문제는 이런 가름의 고착이다. 가름이 고착되면 사유가 끼어들 자리가 없고, 사유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저열한 패거리의식이다. 다름이 용납되지 않는 자폐적 패거리 속에서 자유는 질식되고, 인간의 존엄도 사라진다. 정신적 성숙함은 자기의 경계를 깨고 나가 다른 이의 자리에 서보는 데서 시작된다. 역지사지란 이런 경우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1959년, 건강한 백인 남성인 존 하워드 그리핀은 딥 사우스(Deep South,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등의 남부 지역) 지역에서 자행되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몸으로 체험해보기 위해 흑인이 되기로 작정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적 저항은 잘 알면서도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적 고통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지했다는 자각과 더불어, 나라 전체를 더럽히는 오명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인종차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19) 그는 색소 변화를 일으키는 약을 먹고, 강한 자외선을 쪼이고, 염료를 칠함으로써 흑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는 순간 그는 전율한다. 박박 깎은 머리에 인상이 사나운 흑인이 거울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의 육체 속에 갇혀 버린 것 같은 느낌은 곧 이어 고통으로 이어졌다.

 

“나는 두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은 관찰하는 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공황상태에 빠져 뼛속 깊은 곳까지 느끼는 이였다. 엄청난 외로움이 몰려왔다. 내가 흑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때 나였던 존재, 내가 아는 자아가 다른 이의 육체 속에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35)

 

닫힌 문 앞에서

피부색이 바뀌는 순간 그가 대면해야 할 세상은 이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 때, 세상은 돌연 공포로 변하게 마련이다.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물을 얻어 마실 수도 없고, 가까운 곳에 화장실을 두고도 먼 곳을 찾아 헤매야 했다. 백인 여성의 얼굴을 바라보아도 안 되고,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흑인의 하루 일상은 온통 자신의 열등한 지위를 계속 확인받는 일로 이뤄져”(94) 있음을 그는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간됨이나 재능 혹은 지식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피부색이 곧 그의 존재에 대한 증명서였다. 백인들 앞에서 그는 '없는 사람' 혹은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끔 점잖아 보이는 백인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지만, 그들의 한결같은 관심은 흑인들의 성생활이었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성적인 환타지를 드러내곤 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암시적으로나마 드러내려 할 때면 '증오의 시선'에 직면해야 했다. 마주치는 순간 상대를 돌로 환원시켜 버리는 메두사의 시선 말이다.

 

백인들에게 있어 흑인은 개별적인 주체가 아니라 정형화된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흑인들은 무책임하고, 성 도덕도 다르고, 지적인 한계가 있고, 천부적인 리듬감이 있고, 게으르고, 태평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경험된 것이라기보다는 주입된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론은 이런 이미지를 만들고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그들은 흑인들에게 우호적인 사항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흑인이 이룩한 성과는 고의적으로 빼버린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것이 탁월한 개인의 성취일 뿐 인종 전체의 특성과 관련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진력한다(258). 흑인들은 일상화된 ‘인격 말살’(character assassination)의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흑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자신들에게 부과된 지위를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며 살거나, 백인들의 삶에 동화되기 위해 몸부림치거나, 저항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리핀은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미시시피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흑인들이 서로에게서 더 많은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종의 약자들의 연대랄까? 저자는 흑인들의 모습에서 지울 수 없는 슬픔의 흔적을 본다. 시끄러운 음악도, 술과 섹스에 대한 탐닉도, 커다란 웃음소리도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모진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가슴을 짓누르는 우울 때문에 이를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시끄러운 소음이나 포도주, 섹스, 폭식으로 감각을 무디게 해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걸 그들도 알까? 웃음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웃음소리는 흐느낌으로 바뀌고, 흐느껴 울면 깨닫는 게 있고, 깨달으면 절망으로 떨어진다.”(137)

 

이런 현실에 환멸을 느끼는 이들 가운데는 백인들의 세계에 동화되기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백인처럼 말하고, 백인처럼 입고, 백인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 그들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닫혀 버린 문 앞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소외감이다. 우월한 인종으로의 변신의 꿈, 타자를 통해 자신의 주체를 세우려는 흑인들의 꿈은 늘 좌절로 끝나게 마련이다. 또한 그들의 소외는 이중적이다. 프란츠 파농의 말대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사람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학습된 차별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고 정의로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 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백인들이 흑인들을 비인간으로 타자화하는 순간, 백인들 자신까지도 비인간화 되고 타자화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딜레마에 빠져 헐떡이기보다는 대안적 가치를 찾기 시작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그러한 비폭력적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그리핀은 몽고메리에서 감옥에도 가고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흑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는 모욕과 학대를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꿋꿋하게 학대와 모욕을 견뎌”냈던 것이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흑인의 이런 태도에 몹시 당황했다. “흑인의 행동방침에서 고귀한 존엄성이 느껴지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불명예스런 행동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224)이었다.

 

인종차별주의는 내재적인 가치인가, 학습된 가치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습된 가치이다. 사회 시스템 안에 녹아들어간 차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유도 없이 흑인들을 멸시하고 증오하도록 만든다. 이런 경우 타자 속에 반영된 자기 모습을 보는 성찰은 발생하지 않는다. 성찰과 사유를 거부하는 끈질긴 저항이야말로 인종차별주의의 뿌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종차별주의는 정신의 자기부정이다. 서로 만나 교류하고 삶을 공유하는 체험이 없이는 성찰적 거리를 획득할 수 없고, 그 결과는 정신의 자기 함몰일 뿐이다.

 

백인의 차를 얻어 타고 가던 그리핀은 고속도로 변에서 하차를 강요받은 후 두려움에 떨고 있다가 어느 흑인의 집에 초대 받는다. 숲속에 사는 그 가난한 흑인 가정의 단란한 모습을 보면서 피부색이라는 겉모습만 빼면 모든 점에서 백인들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들도 또한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인간 가족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자기가 선택하지도 않은 피부색소 때문에 열등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 이는 성인도 마찬가지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는 흑인에게서 이런 마음을 빼앗았다. 이는 모든 인종 범죄 중에서 가장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가장 극악한 범죄다. 이런 행위는 영혼을 죽이고 살아갈 의지를 꺾기 때문이다.”(214)

 

만해 한용운은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에서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다가 모멸을 당하는 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거지는 인격이 없다고,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는 주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때, 시인은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다고 말한다. 영혼을 죽이고, 살아갈 의지를 꺾는 인종차별주의가 가장 극악한 범죄임을 인식할 때 그리핀에게 남은 생은, 그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빨이 덜덜거리는 용기

그는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획득한 자기 경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 ‘글’을 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흑인들의 내러티브를 수집하고 기록하여 정리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그것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사회적 차별과 백인 문화의 이면을 폭로하는 폭탄이었다. ‘불편한 진실’에 직면한 이들은 그리핀에게 노골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그는 가족들의 안위를 염려하여 멕시코로 이주하여 살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권투쟁의 현장으로 돌아와 활발하게 일한다.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사회변혁의 열쇠임을 알았기에 그는 출판, 인터뷰, 강연 등을 통해 흑인들이 처한 비인간적인 삶의 현실을 드러냈다. 변화에 나서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용기이고, 이 용기는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는 어쩌면 위협이 효과적인 것은 사람들이 위협하는 자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체득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몸과 신경체계가 ‘안 돼’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우리 의지는 ‘해야 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 “이빨이 덜덜거리는 용기”(324)가 필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길만이 평화의 길이기 때문이다.

 

“작지만 강한 힘을 가진 집단이 부정을 저지르는데도 이를 그냥 묵인하는 한 결국 사회 안정, 진정한 평화, 인간이 동료에게 선의를 가진다는 진정한 신뢰감이 모두 파괴되는 것을 묵인하는 셈이다.”(300)

 

때때로 이런 용기는 결실조차 없이 스러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흑인들의 가슴에 비폭력 저항의 씨앗을 심어주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결국 인종차별주의자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의 기획은 실패한 것인가? 그리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존재는 흑인과 백인 모두의 가슴에 깃든 증오의 힘이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일이 없도록 한 완충제였다. 그는 증오의 시선이나 두려움의 시선이 아닌 형제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리핀을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은 교육, 주택, 일자리, 투표 참여 등의 문제에 있어서 흑인들이 경험하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평화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대안적 삶’을 시작하는 일이다. 그것이 진정한 희망이다. 휘발성이 강한 정서에 기댄 변화는 오래 갈 수 없다. 더디고 거칠망정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내린 변화만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흑인들이 자기 결정권을 가진 존재로 깨어나는 순간 흑인과 백인 사이의 이중적 소외는 극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새로운 빛이 비쳐들었다는 의미이다. 그리핀으로 하여금 흑인들의 삶의 자리에 내려가도록 하고, 인종차별주의에 담긴 인간적 오류에 눈을 뜨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 <<블랙 라이크 미>>의 2006년 판에 덧붙인 로버트 보나지의 발문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 그리핀은 딥 사우스만큼이나 인종차별이 심했던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5살 되던 1935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흑인들과 백인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해했다. 고전 교육을 통해 그의 의식의 지평이 확장되었지만 무의식적인 차별의식조차 몰아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의학대학에 입학했고, 나중에는 나찌에 저항하는 프랑스 학생들의 지하조직에 합세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일을 위해 자신을 위기 가운데 던지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우연히 게슈타포가 작성한 살해 대상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것을 안 그는 프랑스를 빠져나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41년에 미 공군에 입대해 태평양 작전지역에 투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타자’의 뒤집힘을 경험한다. 그는 처음에는 토착민들을 ‘타자’로 그리고 ‘원시인’으로 취급했지만, 정글에서 다섯 살짜리 꼬마의 안내를 받아 살아남은 후에는 그 곳에서는 자신이 ‘타자’이고 ‘열등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그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뇌에 심한 타격을 받고 시력에 큰 손상을 입는다. 이후 10년 세월을 시력을 잃은 채 살아가는 동안 그리핀은 ‘타자’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경험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시력이 돌아오자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며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투신하기로 했다.

 

그리핀이 잠정적이지만 흑인이 되기로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유럽행, 레지스탕스 운동 가담, 전쟁과 실명 들은 그로 하여금 ‘성찰적 자기 거리’를 확보하게 했고, 디아스포라적 시선으로 바라본 미국 사회의 추문거리는 흑인 문제였던 것이다. 타자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야말로 인권과 평화운동의 출발점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리핀을 사로잡았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흑인들의 인권은 다소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흑인’이라는 기표 속에 담길 또 다른 소외자들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지경이다. 동구권 해체 이후 슈퍼 파워로 등장한 미국은 그 막강한 힘으로 ‘타자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이 그것의 예만 봐도 그렇다. 사실 이런 ‘타자 만들기’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는 현실이다. 그리핀은 <<블랙 라이크 미>>를 통해 우리에게 여성, 장애인, 노숙자, 빈민, 실직자, 비정규직 노동자, 재개발 사업을 위해 내쫓긴 세입자, 이주 노동자의 자리에 서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지난 시절 남미의 신학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인식론적 특권에 대해 말했다. 낮은 자리가 아니고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세계 말이다. 그리핀은 ‘타자’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우리 자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리핀 자신도 나중에 실토했다시피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세계관을 지지 혹은 지탱해주고 있던 신학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점이다. 어떠한 형태이든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종교는 이미 제국으로 변해버린 종교이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 이들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불온한 이들의 불순한 책동으로 보는 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일 수밖에 없다. 그리핀이 흑인들의 삶의 자리에 서 본지 이미 50년이 지났지만, 공평한 사회라는 인류의 꿈은 여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다. 가야 할 길이 참 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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