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신앙의 시를 짓기 위하여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신앙의 시를 짓기 위하여

카렌 암스트롱의 <<마음의 진보>>

 

"신앙은 결국 인생이 아무리 비극적으로 보여도 거기에는 궁극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키워 나가는 것이었다."(491)

"신을 알고 나서부터 내가 더 따뜻하고 마음이 넓어져서 사랑을 베푸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그렇게 만든 신학은 훌륭한 신학이다."(492)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도 아니고 확신도 아니다. 나의 적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이 거룩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또 거기에 부응하여 행동하려는 마음가짐이다."(508)

 

"욕망은 언제나 충족을 한 발 앞서간다"는 헤겔의 말은 참 슬프다. 결핍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임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에로스'이다. 풍요의 신과 가난의 신 사이에 태어난 에로스는 충족과 결핍 사이를 부단히 왕래한다. 충족의 순간 결핍에 빠지고, 결핍의 순간 충족을 지향하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이 왕복 운동은 때로는 권태를 낳고, 때로는 안도감을 낳는다. 충족과 결핍 사이를 오가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그 반복되는 리듬에 순응하면서 늙어가는 것이 삶인가? "내 마음이 짚고있는 지팡이는 꽤 멀고 먼 길을 짚고 온 것이어서 비스듬 닳아 있다"는 정진규 시인의 시구가 가리키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가 싶다.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신 분처럼 우리는 마음으로 천국도 짓고 지옥도 지으며 살아간다. 문제는 마음의 주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나를 다스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일까? 불교적 인간관에 따르면 ‘나’란 몸, 감정, 생각 등이 일시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다발일 뿐이다. 마음은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의 양상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그렇다면 마음은 항상적 실체가 없는 것인가? 질문은 꼬리를 문다. 하지만 어떤 답도 늘 그러한 답은 아니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은, 알 듯 싶지만 끝내 알 수 없는 마음의 실상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좀 더 비관적이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17:9)

 

신의 현존이 유보된 현실

세계적인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의 <<마음의 진보>>는 열일곱 살 나던 해에 수녀원에 들어가 7년을 가톨릭 수녀로 보내고 환속하여 종교학자로 변신한 저자의 두 번째 자서전이다. 신을 찾고 싶었던 소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더없는 만족감을 주는 무한한 신비의 품에 안기리라"(6) 믿었고, 신을 삶에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현실로 체험하고 싶었던 카렌의 꿈은 실현되었는가? 수녀원에서, 그리고 수녀원을 벗어난 후 한동안 그가 견뎌야 했던 나날은 신의 현존이나 신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부활절이 오리라는 희망도 없이 언제까지나 모진 사순절만을 살아가는 줄로 알았다. 나는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어디로 나아가는지도 모르고 헛되이 맴돌고 있었다."(24) 하지만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던 그의 마음이 길고 긴 '어둔 밤'을 거쳐 당도한 곳은 결국 신의 마음이었다. 이 책의 원제가 <<나선형 계단>>(The Spiral Staircase)이라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카렌이 속해 있던 수녀원은 세상과 격절된 고도와 같은 곳이었다. 베트남전이 계속되고, 반전평화운동이 벌어지고, 히피운동이 등장하고, 비틀즈의 노래가 세상을 휩쓸고 있었지만, 세상의 그런 소음은 수녀원 담장 너머까지 미치지 않았다. 그곳은 여전히 정서적 완고함과 가부장제적 권위 등 전통의 강고한 힘이 지배하고 있는 무풍지대였다. “공격당하고 무시당하고 공개적으로 질책당하고 누가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받으며 사는 동안, 그는 외부의 자극에 알맞은 행동을 하도록 조건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부모를 만나도 그들의 애정에 제대로 반응할 줄 모르고 다른 이에게 다가설 줄을 모르는 존재,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 뚜껑을 닫은 우물”일 뿐이었다.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제도화된 카리스마가 쇠항아리처럼 의식을 옥죄는 그곳에서 기도는 공허했고, 신의 현존은 늘 유보된 현실일 뿐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카렌은 결국 환속을 허락받아 세상에 나온다. 그러한 떠남은 ‘참된 자기’를 찾아나선 이들이라면 언젠가는 감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심술궂은 세상은 곰살갑게 그들을 맞아주지 않는다. 카렌에게 수녀원 담장 밖의 세계는 또 다른 공포였다. 마치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 때 느닷없이 찾아오는 현기증처럼 카렌은 몇 번의 졸도를 경험한다.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이 공포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할까?”(118) 터전이 흔들리고, 자아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었던 요소들이 신기루처럼 스러지고, 신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현실은 광야 그 자체였다. 바슐라르는 “샤갈적인 어둠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카렌의 어둠 속에는 빛도 사람도 위안도 없었다. 옥스퍼드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되었지만, 자기 자신조차 낯선 사람이 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남은 것으로 기운을 얻으련다

참된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는 타자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카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라는 거친 광야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내적인 부서짐을 경험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인생의 엄중함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폐증을 앓고 있던 8살짜리 아들 제이콥을 돌봐주기로 하고 제니퍼 하트 교수의 집으로 이사한다. 부서질 듯 섬약한 그의 마음은 제이콥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마음을 다하면서도 기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게서 자기의 분신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서 간질 발작을 일으킨 제이콥을 돌보면서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사무친다. 신은 존재하는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시련과 보상을 안기면서 저 위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다스리는 신이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런 발상 자체가 엽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섭리라는 것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그날 밤 희미한 전등불 아래 제이콥을 지키면서 나는 도대체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신을 믿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205)

 

그는 해안으로부터 떠밀려 나가듯 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자신을 본다. 구체적 고통의 현실 속에서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신은 카렌의 법정에서 유죄였다. 그 순간 카렌에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이콥이라는 한 소년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문제였다. 신앙이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구체적 상황 속에서이다.

 

근근히 그를 지탱해주고 있던 것은 교수가 되리라는 미래의 꿈이었다. 하지만 카렌은 자기 행동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하면서 절박한 심정이 된다. 위안과 희망은 멀어지고, 차가운 객관주의가 그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정신과 의사는 어느 순간 무의식 상태에 빠져드는 카렌을 두고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미루기 위해 정신이 만들어내는 방어기제라고까지 말한다.

 

카렌이 삼킨 수면제는 희망과 위안도 없는 삶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몸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살의 충동보다 강렬한 삶의 갈구가 어디 있겠는가? 죽음에 한 발을 걸쳤다가 다시 산 자의 땅으로 떠밀려와 아령칙한 가운데도 그는 어떤 후련함을 느낀다. 그의 자살기도는 어쩌면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왔던 지난날의 미숙한 자신과의 작별예식이었다. 그 작별이 잠정적인 것이라 해도. 문제투성이일 뿐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삶, 시적인 충만의 순간은 잠깐이고 지루하게 견디며 살아내야 할 산문적 시간이 대부분인 삶을 카렌은 이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서러워하기보다는 차라리

남은 것에서 기운을 얻으련다.

 

워즈워스의 시구가 카렌의 주문이 되었다. 카렌은 제이콥을 통해 흘낏 엿보았던 타자들의 세계에 연루되는 걸 꺼리지 않는다. 떠들썩하고 잡다하고 진부한 삶조차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삶의 첫 걸음에 불과하다. 아직도 그는 ‘마음의 진보’라는 보석과 대면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멀다. “만물의 시원은 다림추 앞에서 번번이 더 깊은 곳으로 도망쳐버린다”(토마스 만)는 말처럼 바닥인가 싶으면 또 다른 추락을 경험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글쓰기를 통한 자기 발견

카렌은 박사 논문을 집필하면서 베드포드 칼리지 영문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가끔 “이게 단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문 밖의’ 사람이 아니었다. 종교를 무시하고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생활이었다. 아니, 신앙을 상기시키는 용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욕지기를 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학자로서의 생애가 시작되려는 순간, 손에 잡힐 듯한 행복은 또 멈칫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던 것이다. 학자로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이상한 평온이 찾아왔다. 미래라는 돛에 매어두었던 아딧줄이 끊어지는 순간, 평판에 대한 갈망에서 풀려나는 순간, 행복한 글 읽기가 시작되었다. 가르치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닌 독서 그 자체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그는 목석이 되어버렸던 마음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또 다른 선물이 있었다. 이따금씩 냄새, 시큼한 맛, 번쩍거리는 빛과 공포를 동반하고 그를 찾아왔던 낯선 불청객이 ‘측두엽 간질’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것이 정신의 문제도 정서의 문제도 아닌 뇌의 문제임을 알고, 그것이 약을 통해 조절 가능한 것임을 아는 순간의 기쁨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사면을 받은 듯한 착각 속에서 산다. 간질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믿기지 않는 운명의 반전 앞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길을 걸었다.”(319)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덧걸쳐졌던 베일이 벗겨지고, 평판에 대한 기대를 놓고, 자기 마음을 내부에 유폐시켰던 질병의 정체도 밝혀지면서 카렌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었고 나름의 기쁨도 있었다.

 

하지만 종교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짐짓 외면해 보아도, 종교는 지싯지싯 우리 삶의 주변을 배회한다. 20세기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근대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세속 문화에서 변두리로 강등되었던 신을 다시 무대 중앙으로 올려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349) 그 때문인가? 영성과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은 점점 증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렇지만 카렌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생각과 느낌을 엿보면서 늘 못마땅해 하는 빅 브라더와 같은 신으로부터 여전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어느 날 카렌은 친구 샐리의 권고로 떠나보낸 수녀원 생활의 경험을 정리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지난날의 경험을 기록하여 객관화시키는 것은 일종의 애도작업이라 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기억이나 상상을 서술하는 과정인 동시에, 자기와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한 손 내밈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과정은 또한 주름잡힌 기억의 갈피에 묻어있는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좁은 문으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 책을 쓰는 동안 카렌은 뜻밖에도 수녀원에서 보낸 시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뜻 깊은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직도 자기 속에는 밀도 있는 고양감과 초월감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허무주의를 넘어 공감에로

<<좁은 문으로>>의 출간으로 카렌은 유명인이 되었고, 텔레비전에 출연해 교회와 교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질곡이 되고 있는지를 증언했다. 그는 방송사가 제작하는 사도 바울에 관한 6부작 다큐멘터리에서 대본집필과 진행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는데, 그 일을 통해 “무조건 지적으로 순응하라는 교회 당국의 아집”(392)을 폭로하고, “옹호하기 어려운 교리 체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하루하루 정신의 불구자가 되어 가고”(393) 있는 이들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 제안을 수용한다. 인간은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하는 것인가? 성지 곳곳을 돌며 바울의 행적을 탐문하는 동안 카렌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온 전제를 깨뜨릴 수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울이라는 사나이에게 이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바울로가 걸었던 길을 (대충이나마) 뒤따르면서 하루하루를 바울로와 함께 살다 보니 이 인간의 천재성과 비장한 삶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열정과 판단력과 창조성과 개종자들에게 그가 느꼈을 애정에서 감동을 받았다.”(427)

 

제도화된 종교가 억압의 기제였다면, 타자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점철된 한 사내의 생은 카렌의 마음에 드리운 어둠을 숙지게 만드는 빛이었다. 유대교의 속살을 살피고 십자군의 행적을 더듬는 과정을 통해 카렌은 이슬람의 세계에도 눈을 뜨게 된다. 서양의 어두운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이슬람은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범속화된 종교는 너무나 쉽게 폭력과 결합하고,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 추동되곤 한다. 카렌은 십자군의 허무주의에 충격을 받았다.

 

"십자군은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한테 손을 내밀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한테서 배우려는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의 공포와 원한을 다스릴 줄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이고 망가뜨리고 태우고 모독하고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들의 도덕성을 무너뜨렸다."(435-6)

 

허무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타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된 닫힌 마음이고, 타자를 파괴함으로 결국은 자기를 파괴하는 죽음의 길인 셈이다. 십자군 연구를 통해 카렌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확신은 특히 종교 문제에서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439)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심연을 본 카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솟아났다. 카렌은 유대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들을 갈라놓는 적개심의 뿌리를 파헤쳐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싶었다. 이런 갈망이 그를 종교학자의 길로 이끌었다. 종교에 깊이 파고들수록 '신은 하찮은 농담거리'가 아니라는 사실과, 참된 "구도라는 것이 '진리'라든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얼마나 알차게 사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457)

 

먼 길을 우회하여 카렌이 당도한 진실은 '공감'이야말로 인간을 신의 현존 앞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사실이었다. 비정함이라는 보호막을 무너뜨리고 타인들의 세계에 가슴을 열 때 영혼의 새벽이 시작된다. 우리가 속한 종교의 참됨은 배타적인 자기 진술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생을 고양시키는가에 달려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카렌이 말하는 십자군의 허무주의에 깊이 중독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냉소와 회의의 어둔 밤을 견디던 카렌이 고통 받는 인류에 대한 연민을 통해 참된 고양의 문턱에 다가섰던 것처럼, 한국 교회도 그런 연민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 속에서 얼핏얼핏 드러나는 신성을 볼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엾은 사람들인가? 비스듬히 닳은 마음의 지팡이를 챙겨드는데, 캐틀린 노리스의 말이 배음처럼 들려온다.

 

“신앙의 시를 짓기 위하여 우리는 거짓 확신에 만족하는 것을 배우는 대신 모호함과 신비를 끌어안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