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시달리는 조국 하나를 가슴에 품고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시달리는 조국 하나를 가슴에 품고

-조현의 <<울림>> 서평

 

팔레스타인 땅 가자 지구에서는 연일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다. 온 세상이 전쟁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요지부동이다. 세계의 최강대국이라는 나라는 은근한 말투로 전쟁을 부추긴다.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의 접경 지구에는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다 한다. 미사일이 날아가 화염이 솟아오르면 박수를 치고, 그것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안전지대에 있는 그들에게 전쟁은 마치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신나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귀에는 몸이 찢긴 이들의 신음소리도, 가족을 잃은 이들의 비통한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학살극을 희화화하는 오락 프로그램도 있다. 그들에게 죽어가는 '그들'의 숫자는 운동 경기에서 '우리'편이 얻은 스코어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청원으로 들으신다는 분의 마음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귀가 어두운 내게도 어디선가 생생한 탄식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며 울고 계시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눅19:42) 이스라엘은 생존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꾸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던, 유대인에게 있어 가장 큰 죄는 그가 표상하는 바를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던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말이 무색해지는 나날이다. 더 이상 이스라엘은 인류의 새벽도 저녁 어스름도 아니다. 인간의 불빛이 가물거리고 평화의 꿈이 속절없이 스러지고 있는 이 시대에 기독교는 과연 희망인가? 이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 사사화된 신앙을 넘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은 때에 한겨레신문의 종교전문기자인 조현의 <<울림>>이 나온 것은 무슨 섭리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24명의 위대한 혼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성직자도 있지만, 대개는 오직 예수 정신에 사로잡혀 척박한 역사를 사랑의 쟁깃날로 갈아엎은 화광동진(和光同塵, 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 함)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기는 구한말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져 있지만, 그들은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영혼의 쌍둥이들이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시인 리진의 표현처럼 그들은 "오직 시달리는 조국 하나를 가슴에 품고" 울고 웃으며 역사의 밤을 밝힌 빛들이었다.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이 오롯한 사실임을 몸으로 증거한 선각자들이었다.

 

하지만 선각자들의 길은 외로움의 길이기도 하다. 제도 교회는 그들을 품을만한 넉넉함이 부족했고, 때로는 신의 무덤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리스마가 범속화될 때 종교는 그 역동성을 잃고, 제도에 안주하게 된다. 개인주의적이고 사사화된 신앙은 필연적으로 예언자 정신을 불편하게 여긴다. 그러니 예언자적 정신을 품고 사는 이들은 교권적 질서를 질곡으로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산정현교회의 장로였으면서도 완전한 무소유를 지향했던 '종들의 모임'에 끌렸던 장기려의 경우(53)가 그렇고, 부정의를 보고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배웠지만 교회 내부의 세력 다툼에 실망하여 교권의 틀에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신앙의 터전을 갈구하다가 무교회주의의 길로 나아갔던 김교신의 경우(75)가 그러했다. 신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라고 외치다가 교권에 부딪혀 출교 당하면서 "유일의 재판관은 파스칼이 하늘 법정에서 호소하며, '주여, 나는 당신께만 소송하나이다'라고 절규했던 그분뿐"이라 했던 변선환(93)이나, "교리와 신조의 송독, 교회 출입의 형식, 이런 신앙의 형식(껍질)으로 전부를 삼아 스스로 속는 자, 그 얼마나 많은 현대인고. 네가 신앙의 소유자이냐 그러면 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될지어다" 했던 이용도의 경우(282)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이란 역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릇된 확신에 근거하여 역설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반신앙이다. 창조적 회의를 허락하지 않는 교권은 불관용과 박해를 통해 자신을 유지하려 한다. 주입된 정답만이 암송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신비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우연인가? <<울림>>에 소개되고 있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앙바틈한 교권으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 안에 머물면서 교권과 교리의 철옹성을 향해 온 몸을 내던지던 이들이나, 제도 교회의 바깥에서 틈을 만들며 역사 속에 하늘 바람을 불어넣으려던 이들 모두 하나님의 아들딸임은 분명하다.

 

조현을 통해 침묵을 깨고 우리 곁으로 돌아온 이들 화광동진의 사람들이 반가운 것은 그들이 희망이란 객관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한 사람’에게 있다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주체적 신앙인

우리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대개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간직한 채 주체적 삶을 모색하던 이들이었다. 함석헌과 김흥호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다석 유영모는 “현생보다는 저 너머 영원한 세상에 대한 의문으로 궁극을 탐문”(61)하던 인물이었다. 그 물음은 평생 지속되었다. 도산 안창호를 통해 동포를 깨울 인재를 기르는 일에 진력하던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3년 7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온갖 고문을 받았으나 그런 중에 신약성경을 백독해 내면의 신앙을 반석에 세웠다. 그는 기독교를 의(義)의 종교로 생각했다. “거짓이나 분열이나 게으름이나 도적질이나 죄는 의가 아니며, 자기만 잘살려 하거나 자기만 높아지려고 하거나, 자기의 이익만 노리는 것도 의가 아니며 권모술수나 이기심도 의가 아니라 여겼다.”(154) 신앙이란 자기 입장을 세우는 것이 아니던가? 일일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울림>>에 소개되고 있는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마음에 공명한 주체적 신앙인이었다.

 

그들은 또한 배움을 향해 자기를 늘 열어놓고 사는 사람이었다. 가르칠 것만 있고 배울 것은 없다는 듯이 처신하는 엉터리 종교인들에 비해 그들은 누구에게라도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이승훈은 자기보다 어린 안창호나 유영모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이용도는 자신의 태도를 ‘학생심’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취사의 일을 주님께 부탁한 나는 무엇에나 다 접근합니다. 나를 기를 수 있어 취하고 나를 기를 수 없어 나는 버립니다. 나는 창기에게서도 배움이 있는 자요, 난봉에게서나 아이에게서나 무식한 자에게서나 불교인에게서나 무교회주의자에게서나 누구에게서든지 다 배울 바를 찾는 자이외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어떤 때 저희의 어떤 점보다 못한 것을 내 속에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겸허히 저희에게서 이를 배우지 아니치 못합니다. 나는 남을 가르칠 자가 아니요 배울 자이니 일생 학생심을 가지고 배워 마땅한 자입니다.”(284-5)

 

무지함을 신앙으로 포장할 때 종교는 타인들과의 소통을 거부하면서 편협한 독단에 빠지기 쉽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대상과 만나든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는 영혼의 자재함은 오직 자기 삶이 길을 찾는 자임을 자각하는 이의 특권이다. 길을 찾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앞서 그 길을 걸어간 이들의 발자취이다.

 

• 결정적 순간

<<울림>>에 등장하는 이들을 진리의 길로 이끈 매개체들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스승이라는 매개를 통해 예수와 만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선환의 정신을 주조한 것은 스승 신석구 목사에 대한 기억이었다. 걸인들을 위해 자기 일생을 바친 거두리 이보한에게는 서문교회의 김인전 목사가 스승이었다. 그런가 하면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 새 삶을 얻은 이들도 많다. 이세종은 산당을 짓던 목수를 통해 기독교에 접한 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세기 1장 1절과 만나는 순간 영의 눈이 열리는 체험을 했다(195). 초기 교회의 대부흥사인 김익두는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담긴 전도지를 읽는 순간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이야말로 말씀 사건의 증인들인 셈이다. 들뢰즈의 사건철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덧없이 지나가 버릴 수도 있는 순간은 그들에게는 하늘이 개입하는 순간이었다. 나환자의 아버지인 최흥종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얼굴이 썩어 내리고 있던 나환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들어오던 순간, 그리고 그 나환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뜨리는 순간, 최흥종은 우연히 그 옆을 지나고 있었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저 지팡이 좀 집어주시겠소?”라고 그를 불러 세웠을 때 그의 뇌리에는 온갖 생각이 교차했겠지만 마침내 그가 결단하고 지팡이를 들어 환자에게 건넸을 때, 그리고 나환자의 얼굴에 떠오른 작은 웃음꽃을 보았을 때 그는 옛 삶을 벗어던지고 예수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229-231).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지 않던가? 그들은 길을 찾는 순간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중심을 잡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마음의 습기가 한 순간에 스러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길을 찾은 사람도 그 길 위의 실존에 항구하기 위해서는 훈련을 필요로 한다. 어떤 이는 새벽마다 냉수욕으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어떤 이는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어떤 이는 부부관계까지 끊어버렸다. 그것은 욕망의 습기(習氣)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치열함의 표현이다. 김재준 목사의 삶의 신조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산하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127-128)

 

• 예언자 정신으로

이처럼 뜻을 정하고 살았던 그들의 삶을 요약하자면 예언자 정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언자 정신은 불의에 대한 고발이요,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김교신은 “부정의를 보고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한 예수”에게서 일제의 부정의를 청산할 희망을 발견했다(74). 이승훈은 의가 지배하는 역사를 열기 위해 자신을 바쳤다. 바다를 향한 그리움을 품고 흐르는 강물처럼 그들은 의에 대한 목마름 하나로 역사의 가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열림>>이 소개하고 있는 이 땅의 예수들의 또 다른 특색은 작고 여린 생명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었다. 1950년대에 이미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산동네에서 발달장애아들을 모아 그림을 가르치고,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이신(74), 대중을 구하려 하기보다는 한 영혼을 우주로 알고, 하나님으로 알고, 마치 살아 돌아온 예수님을 영접하듯 한 이현필(214), 가족들은 한뎃잠을 자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냉대 받는 사람들을 집으로 모셔들인 강순명(239), “주여, 주의 능력과 사랑이 제 손을 통해 임하시어 이 괴로운 병에서 그들을 구하옵소서. 주여, 자비와 긍휼을 아끼지 마옵소서” 기도하며 나환자들과 이재민, 고아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던 방애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증언한 작은 예수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뜨거운 영혼을 거울삼아 비춰보니 그리스도교라는 허울만 벗겨내면 도덕성도, 거룩한 분노도, 세상에 가득 찬 신비에 대한 놀람도, 세상에 가득 찬 고통에 대한 민감한 아픔도 없이, 공허한 대중성에 빠져버린 오늘의 교회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 여겨진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권력의 패권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순응하는 순간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빈 집이 될 수 있음을 아프게 상기시키고 있다.

 

아프리카의 순교자인 카즈 뭉크는 역사 속에서 교회의 표징은 사자와 어린양과 비둘기와 물고기였다면서, 교회의 표징이 카멜레온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용기’라고, 예수 정신으로 살아갈 무모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은 그 불을 끄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풀무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로써 세 젊은이는 고난 속에 깃드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신의 말대로 예수는 지금 “나를 믿어달라고 요청하시는 것보다 내 속을 좀 알아달라고”(105) 하신다.

<<울림>>은 불이 난 줄도 모른 채 느른한 잠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를 깨우는 큰 종소리이다. 옛 선비들이 스스로 경성하기 위해 차고 다녔다는 성성자처럼, 이 책은 우리의 식어버린 마음에 울리는 경종이다. 예수로부터 발원하여 흐르다가 이들 24명의 모습으로 솟구쳤던 진리의 수맥은 눈에 보이진 않아도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 속에서 그 수맥이 꿈틀 파동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현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우리 기억 속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이들을 우리 앞에 현전시켰다. 이들의 이야기를 더 풍요롭게 복원하고, 또 다른 위대한 영성가들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