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진부한 일상에 하늘빛 끌어들이기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진부한 일상에 하늘 빛 끌어들이기

구미정의 <<야이로, 원숭이를 만나다>>

 

"인간은 무상한 사물에서 영속하는 것을, 잠시의 것에서 영원한 것을, 세계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영속하는 것이 현존한다는 표지로, 잠시의 것은 영원한 것이 실재한다는 상징으로, 세계는 하느님의 위대한 성사로 변형된다."(레오나르도 보프, <<성사란 무엇인가?>>, 분도출판사, 10쪽)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인 것이다."(칼 라너, <<日常>>, 분도출판사, 8-9쪽)

 

발랄한 정신

칼 라너와 레오나르도 보프를 통해 'Sacramentum Mundi'라는 용어가 소개된 후 일상의 성화라는 용어는 다소 진보적인 신학자나 신앙인들을 사로잡는 화두가 되었다. 속악하고 진부한 일상은 일쑤 권태를 자아내지만, 그 이면에 깃든 영원의 빛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일상은 값진 보화가 묻혀 있는 밭인 것이다. 일하고 쉬고, 길을 걷고, 앉고 일어서고, 보고 듣고, 웃고 울고, 먹고 배설하고, 자는 등의 모든 행위 속에서 하늘의 기미를 읽을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 삶이 허무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구미정은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교회에 내려진 소중한 선물이다. 구미정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이들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정신의 발랄함을 느낄 수 있다. <<야이로, 원숭이를 만나다>>에 나오는 49꼭지의 글들은 저마다 저자의 인식의 레이다에 잡힌 당대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아름답고 가슴 찡한 이야기도 있지만 대개는 우리 사회의 이면에서 일어나고 있으나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고통'을 향해 마음을 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독자들과 소통하기를 꿈꾸지만 공감과 연민을 강제하지 않는다. 리좀적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탈주의 선이 경쾌하기에,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에도 그의 글은 강박적이거나 억압적이지 않다. 재미없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이 새삼 고마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언어는 경쾌하다. 그리고 유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볍지 않다. 그의 글에 '아픔'은 있지만 '냉소'는 없다. 현실에 대한 성찰과 대안적 삶에 대한 탐구가 균형을 이루고 있기에 그의 글은 희망적 여운을 남긴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예언자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눈으로 본 하느님의 관점으로 말한다” 했다. 또한 “예언이란 하늘의 눈으로 인간 실존을 주석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구미정이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종의 예언이다. 이 말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신학자의 말이 예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어야 하나? 그는 어떤 주제를 말하더라도 신에 대해 말하는 자(God-talk)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잊지 않는다.

 

문체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닌 것처럼, 글은 저자의 존재를 드러낸다. 예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한다. 내용의 새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담론을 전개하는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을까? 사실 언술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화자의 진정성이다. 말 잘하는 이의 청산유수식 웅변보다는, 말과 존재가 오롯이 일치하는 이들의 어눌한 말이 사람들의 가슴에 우렁우렁 울리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것은 예수라는 존재에 대한 놀람이 아니었을까? 구미정의 글의 미덕이 있다면 그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의 글을 돋보이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꼽자면 그것은 관점(perspective)의 일관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글이 난삽하게 여겨진다면 우선 관점이 확고한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지만 굳이 구미정의 관점을 정리하자면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첫째,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성서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둘째, 그는 새로운 세상의 대안을 '여성주의'와 '생태론'에서 찾고 있다. 인간다움의 표징을 찾아볼 수 없는 문명, 생기를 잃어버린 세상을 회복시킬 대안으로 그가 내세우는 것들에 대해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말미암아 점점 황폐해져가는 작금의 현실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의 이런 관점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작고 여린 것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

저자는 우리 사회의 그늘진 자리에 유폐된 이들에 대한 본능적 친연성을 느끼는 것 같다. 그는 사르트르가 도구의 특징을 설명할 때 사용한 '투명성'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여 사회를 분석한다. "투명성이란, 어떤 물건이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75) 반면 "어떤 물건이 정상으로 작동되지 않아 곤란을 겪을 때 그 사물이 비로소 인식의 범주로 들어오는 현상"을 가리켜 사르트르는 '불투명성'이라 한다.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의 범주에는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풍경일 뿐 존재가 없는 사람들,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구미정은 이름과 색깔을 부여함으로서 그들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그들의 존재를 세상 앞에 드러낸다. 매매춘 여성, 탈북자, 기러기 아빠, 소방관, 장애인, 입양인, 자살자 혹은 자살 미수자, 자기의 몸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등이 그들이다. 인간의 과도한 소비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있는 창조세계도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구미정이 주목하는 것은 이 땅의 마리아와 마르다들이다. 그들은 왜곡된 이미지로 덧칠되어 위계적 질서라는 질곡 속에서 속울음을 울고 있다. 현모양처라는 이름 속에 갇혀 버린 여인들, 남성들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몸매 가꾸기에 매달리는 여성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더불어 분노를 느낀다. 이러한 분노는 막대한 권력과 기술로 반생명적인 문명 질서를 온존시키려는 이들에 대한 경계와 분노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의 조용한 분노가 소중한 것은 그 속에서도 대안적 세상의 꿈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저자는 작고 여린 것들,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들, 여성적인 것들 속에서 새로운 세계의 씨앗을 본다. 예컨대 팔꿈치 아래와 무릎 아래가 없는 필리핀 여인 매기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아버지의 학대와 오빠의 성추행까지 겪으며 천덕꾸러기처럼 살아왔지만 매기는 지금 거인처럼 살고 있다. 매기는 버림받거나 학대받은 어린이들, 강간당하거나 가정 폭력에 희생당한 여성들을 위한 쉼터요, 재활교육기관인 'GPS-BK'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그의 명랑하고 천연덕스러운 삶의 모습을 보며 찬탄한다.

 

"그는, 개인의 한恨은 적극적으로 외화外化되지 않는 한, 그래서 유사한 아픔을 지닌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보살피고 다시 살리는 일로 승화되지 않는 한, 결코 치유되지도 극복되지도 않는다는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었다."(27-28).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계획했던 삶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삶의 비애는 우리 꿈을 살짝살짝 비껴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온다. 꿈도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꿈이 깨지는 데서 오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도 용기이다. 또 때로 고통은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진정한 자아'를 깨우기도 한다. 저자가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은 이인 마리아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숨막히는 고통 속에서도 생명을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으며 검질기게 살아내는 모든 이들의 초상이다. 민가협의 어머니들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마리아들이 아닐까?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며 죽어갈 때에도 살아남았고, 그 아들의 무덤도 지켰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억울해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고도 살아남았다. 누구도 그의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거기에 부활의 소망이 있다.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을 보았다."(66-67)

 

자칫하면 숨기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개인사에 관련된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그것은 개인적 체험도 공적 자산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언니네 늦둥이 솔이는 6개월 만에 세상에 태어난 미숙아였다. 솔이는 미숙아들에게 올 수 있는 합병증을 하나하나 겪어내면서도 솔이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저자의 직관이 빛나는 것은 그 다음 대목이다.

 

"솔이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해 있던 언니 가정에 치유를 주러 왔다. 세상을 원망하며 좌절과 한숨에 빠져 있던 그 가정에 화해를 주러 왔다."(213)

 

이런 전복적 사유야말로 성서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화육'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어린양이 보좌 한가운데 있다"는 계시록의 말씀을 근거로 기독교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죄값을 지불하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우주 안에 있는 힘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연약한 것, 상처 입은 것, 돌봄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오히려 세상을 치유하는 역설에 주목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강고한 체제에 틈을 내고, 그 속에 하늘 빛을 끌어들이는 이들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일상의 성화이다. 저자가 아이들의 놀이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온몸으로 사회적 인습에 부딪쳐나가 기어코 길을 만들고야 마는 이들에게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틈을 만드는 사람들, 그들은 김지하 시인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엇'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비뚜로, 어긋나게, 서로 비켜가면서, 서로 걸쳐지면서, 또는 조금'을 뜻하는 이 말을 김지하는 반대되는 것들을 일치시키기도 하고, 서로 벌어지게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시적 감흥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그런 '엇' 덕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멈추어 서게 하고, 스스로의 인습적 삶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만드는 사람들, 곧 '틈'을 만드는 사람들, '엇'을 만드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건강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살림' 사역에 동참하기

시간의 종교인 기독교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것은 시원과 종말이었다. 콘스탄틴 이후의 기독교는 '예언자적 전통'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현실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삶의 원칙을 제시해야 할 기독교가 현실에 투항하거나,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중적 태도를 낳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신학의 과제가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제는 이것도 신학적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공간을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도 역시 신학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일상의 자리야말로 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구미정은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살림' 사역에 눈길을 주고 있다. 살림 밥상을 차리는 것, 지속 가능한 소비생활을 하는 것, 아이들에게 평화 감수성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 느림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모두 파시스트적 속도로 변화해가는 세상에 '엇'을 만드는 행위인 동시에, 일상을 성화시키는 일이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등장하는 소년 오스카는 음란함과 파시스트적 광기에 사로잡힌 어른들의 세계를 보고는 성장을 멈추고 영원한 소년의 자리에 머물려 한다. 전쟁을 독려하는 나찌즘의 선동장에서 사람들이 모두 군악대의 행진곡에 발을 맞춰 행진하고 있을 때, 계단 아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오스카는 늘 들고 다니던 양철북을 쳐대기 시작한다. 행진하던 사람들은 걸음의 리듬을 잃고 허둥거린다. 어느 순간 오스카의 북소리가 높아지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왈츠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군국주의적 광기가 지배하던 현장을 춤마당으로 바꾸어놓는 오스카의 그 북소리. 구미정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일까? 어쩌면 분홍신이 신겨진 그는 차라리 춤판에 뛰어들기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몸으로 그려낼 더 자유롭고 신바람나는 춤사위를 기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