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불온한 시에게 길을 묻다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불온한 시에게 길을 묻다

차정식, <<한국 현대시와 신학의 풍경>> 서평

 

• 시를 읽는다는 것

시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인도했던 토끼처럼 문학은 우리를 이미지의 나라(image-nation/imagination)로 안내한다. 그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시간은 새로워지고, 삶의 그림자들은 새로운 빛을 부여받는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무반성적으로 겪어내던 우리의 일상도 일단 언어의 기표 속에 담길 때면 돌연 새로운 형태와 빛을 입고 우리 앞에 현전한다. 시인은 ‘말’이라는 올가미를 가지고 현실을 잡아채 그 현실을 잊지 못할 순간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예민한 지성과 감성의 촉수를 가지고 세상을 맛보고, 더듬고, 부둥켜안고, 뒤집어엎는다. 시인은 분주한 이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을 보고, 산문적 삶에 길들여진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기에 시는 현실의 최전방이다. 따라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와 현실을 새롭게 바라봄이요, 우리 삶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한편의 시를 정밀하게 읽을 때 우리의 호흡은 깊어지고 고요해진다.

하지만 시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학 작품이 추레한 우리 현실이나 존재를 되비추어 주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다(이상). 다시 말해 ‘읽는다’는 행위 속에는 늘 행위자가 포함된다는 말이다. 물론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라서 나의 악수를 받을 줄 모른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당위’와 ‘현실’ 사이의 불화를 시인한다는 것이다. 삶과의 화해는 이때 시작된다. 문학작품, 특히 시를 잘 읽는다는 것은 삶과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쩌면 시 정신이 사라진 시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가치가 경제 논리로 환원되는 세상일수록, 시는 더욱 소리 높여 낭송되어야 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임레 케르테스는 자신의 나찌 강제수용소 체험을 기록한 책 <<운명>>에서 수용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상상과 자살과 탈출이 그것이다. 그는 스스로 보기에도 가능성이 가장 적은 첫 번째 방법으로 살았다고 고백한다. 강제노역의 현장에서 따뜻한 차가 끓고 있는 집을 상상하는 것, 공포의 현실 앞에서 가족들과의 친밀한 대화를 상상하는 것, 그것이 자기를 살게 했다는 것이다. 이 공포의 시대에 상상력의 사치를 누리는 것쯤은 허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엄혹했던 시기에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시는 가파른 현실을 더위잡고 오를 수 있는 힘을 공급하기도 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현실의 이면에 있는 밑절미를 보는 일이요, 현실 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일인 것이다.

 

• 세속적 예언자들

차정식 박사(이하 차정식)의 <<한국 현대시와 신학의 풍경>>에는 그런 시 읽기의 즐거움과 결실이 다양하게 직조되어 있다. 신학자가 시를 읽는다는 것, 더군다나 전문 비평가 이상의 감식안을 가지고 시를 고르고, 맛보고, 해석하여 독자들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우리 풍토 속에서는 상당히 희귀한 일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차정식은 신학을 하는 이들이 시를 읽어야 할 까닭이 있다고 말한다.

 

본래 시와 종교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 고대의 제천의식을 주재하던 이들이나 샤먼들의 무가(巫歌)는 시와 종교가 분화되기 이전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종교가 거룩하고 영원한 것과의 교통이나 합일의 욕구를 제도화하기 시작하자, 시는 교권적 질서 속에 수용될 수 없는 인간의 욕구를 드러내는 형식으로 독립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종교와 끝없는 회의와 질문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시 혹은 종교는 서로 버성길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그렇지 않다. 차정식은 이 점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그는 시와 문학 작품을 일종의 메타 신학적 통로로 이해하는 그는 시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닫힌 교의적 체계에 가두지 않고 열린 자유 속에 풀어드리는 송축의 방식이자 인간으로서 바칠 수 있는 최대치 예의라고 나는 일관되게 생각한다.”(6) 그의 시 읽기는 신학자의 일탈이거나 취미생활이 아니라 그의 신학함이 당도한 필연의 세계인지도 모르겠다.

 

“두부 같은 퍽퍽한 인습에 기댄 믿음, 넝마처럼 남루한 비존재의 기계적인 믿음, 성공주의의 노예로 포획된 주술적인 믿음, 남의 최면에 강박된 타율적인 믿음, 존재의 날렵한 날갯짓, 존재의 궁극을 향해 뒤뚱거리며 춤추는 흥겨운 어깻짓을 잃어버린 채 따개비처럼 땅에 달라붙어 웅크린 자폐적이고 자만적인 믿음, 모름지기 이 모든 믿음은 꿈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다시 시작하는 존재의 나비가 되어야 하리라.”(189)

 

인습적인 믿음, 타율적인 믿음, 조금의 비틀거림도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믿음에 그는 넌더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중력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믿음, 애벌레처럼 꿈틀거릴 뿐 좀처럼 날개를 얻지 못하는 믿음을 향해 그는 침을 뱉고 있다. 믿음이라 말하지만 그가 속해있는 신학 동네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터이다. 이런 화석화된 믿음에, 그리고 신학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신학을 신과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전복적 비판의 학문으로 갱생시키기 위해서 도저한 언어의 풀무질을 통과한 시의 세계는 이 시대에 절박하고도 필수적인 양식이 아닐 수 없다.”(6ff)

 

이쯤 되면 그의 시 읽기는 자폐적 담론의 마술동산에서 신학과 신앙을 해방시켜줄 동아줄 인 셈이다. 차정식의 마음을 사로잡는 빼어난 시인들은 언어의 조탁에만 탁월한 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는 세속적 예언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인가? 잠시 후에 보겠지만 차정식의 시 읽기는 성경 읽기의 방식과 흡사할 때가 많다. 그는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천천히 시를 맛본다. 허겁지겁 읽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까지 정밀하게 읽고 그것을 여러 차례 되새김질한다. 그의 지성과 감성에 포착된 시인들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4부로 구성된 이 책 각 부 제목(“초월과 방랑, 역사와 자연”, “치열한 대결, 거룩한 세속”, “관조의 양상, 성찰의 초상”, “사물의 즐거움, 생명의 아름다움”)만 보아도 저자가 눈길을 주고 있는 시의 세계가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곤고하고 신산한 삶을 견뎌내기 위해 먼 곳에 눈길을 던지는 시로부터, 홉뜬 눈으로 현실과 치열하게 맞서는 시들, 세상의 작고 여린 것들 속에 감춰진 초월적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몸을 낮춘 시들, 심지어는 다소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시들까지도 성찰을 위한 거울로 삼는 것이다. 그는 독신적인 수사를 통해 종교적 권위를 비틀고 해체하는 시인들(이성복, 권혁진, 최승호 등)의 냉소를 '신 너머의 하느님'(God beyond god)을 찾는 과정으로 보고 싶어한다. 속된 삶의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거룩한 것들을 눈물겹게 보듬어 안으려는 황지우 시인에게 그가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 풍부한 해석

차정식의 시 읽기는 풍요롭고도 정교하다. 그는 시를 읽고 자기 감상을 적당히 덧입히는 불성실한 독자가 아니다. 그는 한 시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를 다룬 다른 비평가들의 글도 꼼꼼히 읽는 것 같다. 시 한 편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 그가 들이는 공력은 대단하다. 그는 특히 그 시인의 작품 전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나 단어에 주목한다. 뿐만 아니라 시적 심상이 전개되는 시공간, 그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혹은 움직임까지도 그는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예컨대 고진하의 시 <흑염소의 만트라>를 다룰 때 차정식은 소리의 길을 따라간다. 제 몸에서 나는 '죽음이 자라는 소리'에서 무릎 관절에서 나는 '똑, 똑, 삭정가지 부러지는 소리'로, 다시 '멍머구리 들끓듯' 일어나는 내면의 소음에서 자기가 무슨 구루라도되는 양 '음, 메에에에…음, 메에에에에…' 만트라 하나를 던져주는 흑염소의 울음소리로, 마지막으로 '무뚝뚝한 기차의 기적 소리로 전개되는 소리의 길을 따라가면서 차정식은 "내면의 소음을 타자의 소리로 타파"해야 하고, "소리는 소음의 장애를 뚫고 공명하는 언어로 소통될 때" 해탈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감춰진 한 소식을 듣는다.

 

앞에서 그의 시 읽기가 성경 읽기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성서학자답게 텍스트를 정밀하게 읽는다. 그의 눈길은 우리가 소홀히 하기 쉬운 문장부호, 접미사, 종결 어미 등의 미시적 영역까지 놓치는 법이 없다. 예컨대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분석하면서 시인이 컴마(,)를 자주 사용하는 까닭은 "절박한 내면이 급박하게 분출되지 않도록 절제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쉼표를 통해 "제 감정의 이면을 살피며, 그 너머의 지평으로 감정을 승화시킬 통풍구를 모색한다"(17)는 것이다. 김지하의 <회귀>를 분석하면서 그는 연마다 반복되어 나타나는 '가데'라는 서술형동사 하나가 만들어내는 쓸쓸한 정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련 꽃잎의 추락과 소멸, 그와 함께 모두 흙으로 도아가야 하는 생명의 행로와 저승의 분위기에 썩 어울리는 울울하고 씁쓸한 정조가 이 '가데'라는 단어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다."(137)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 아닌가? 하지만 '가데'라는 단어의 역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이 시의 리듬을 선도하며 비틀거리는 시의 박자에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도 한다. 차정식의 시 읽기가 예사로운 경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외에도 도처에서 발견된다. 음악의 감동은 소리가 끊긴 후에 남는 울림에 있듯이 그는 시가 표현하지 않고 남겨둔 여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시 해석이 옳으냐 그르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해석에는 맞고 틀리고가 없다. 오로지 풍부한 해석이냐 빈곤한 해석이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해석이냐 불모의 해석이냐, 새로운 지적 자극을 주는 해석이냐 단조롭고 지루한 해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말은 늘 경청되어야 한다. 차정식의 시 해석은 풍부한 해석이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해석이고, 새로운 지적 자극을 주는 해석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흔들림과 성찰

하지만 전문 비평가가 아닌 그가 시 해석에 이처럼 공을 들이는 까닭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학적 언어를 풍부하게 하고 그 사고의 진폭을 확장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시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미학적 판단이 없을 수는 없지만 도덕적 판단이 모든 것을 재단하지도 않는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이탈의 힘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언제나 우상파괴적이며 전복적이다. 시인들에게 세상은 늘 낯선 곳이다. 아니 그들은 세상을 낯선 곳으로 만들어버린다. 지상의 중력을 운명이려니 여기고 사는 이들에게 그들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곳에 있으면서 다른 곳을 꿈꾼다. 그들은 현상을 의심하고, 재해석하고, 해체한다. 시인은 그렇기에 불온하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 시인의 자리가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차정식이 시의 세계에 친밀하게 다가서려는 까닭은 자폐적인 회로에 갇힌 신학을 해방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의 신학에게 절실한 것은 흔들림을 위한 여지이다. “삶의 복음을 문자적으로 교리화하고, 예수의 역사적 교훈을 탈역사적 예전 형식으로 변질시킨 왜곡”(329)을 바로잡는 일에 시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차정식에게 시는 강고한 신학에 균열을 만들고, 틈을 만드는 하늘의 망치이다. 상상력의 촉수로 현실의 강고한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틈을 만드는 시인들이야말로 신학의 질곡에 갇힌 이들의 숨구멍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를 외면한다. 눈 속에 갇힌 사람의 달콤한 꿈처럼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림 속에 서 있으면서 흔들림 없는 세계를 지향하게 마련이지만, 흔들림이 주는 불편함과 현기증 때문에 대개는 안주의 길을 택한다. 그들은 자기 동일성을 깨뜨릴 가능성을 갖고 다가오는 어떤 외부의 틈입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실존의 부박함인 동시에 실존의 부정이다. 흔들릴 여지를 주지 않는 종교처럼 강박적인 것이 없다. 흔들림이 없으면 성찰도 없으니 말이다. 차정식이 독신의 언사조차 마다하지 않던 시인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빨리 초연해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우주적 공동체의 꿈

차정식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심호흡을 할 필요가 있다. 단문보다는 중문이 그의 유장한 호흡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듯하다. 그의 글은 술술 읽히지 않는다. 때로는 거듭해서 읽어야 겨우 그 뜻을 가늠할 수 있을 때도 있다. 문장이 졸렬해서가 아니라 그의 사유의 풍경이 그만큼 많은 수사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수채화라기보다는 유화라 할 수 있다. 그의 문장은 그의 사유가 중첩된 흔적이다. 그의 글은 독자들을 괴롭힌다. 때로 그의 박학함은 독자들을 주눅 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간혹 그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바를 깜박 놓치는 경우도 있다. 폭넓게 보듬고 풍부한 전거를 바탕으로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간결하게 말해야 할 때도 있다. 박이약지博而約之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 아니던가. 가끔은 그의 자세한 설명이 시적 감흥을 앗아가는 경우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저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시들은 대개 주체가 외부 세계를 자기 속으로 끌어들여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이다. 그런 시 속에 그려진 현실은 당연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시인의 사유를 통해 매개된 현실이다. 그 때문인가?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가장 추한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본다. 하지만 그가 “현실 속의 가난은 여전히 추하고 역겨우며 독살스럽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가난에도 아름다움의 틈새가 있으며, 그리로 가난한 삶을 관조하며 누리는 신학적 미학의 여백이 깃든다”(516-517)고 말할 때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세상에는 객관적 거리 확보조차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가난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껄끄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시 읽기를 통해 열어 보인 새로운 지평에 주목한다. 특히 곤고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김지하가 걸어간 시의 궤적을 ‘장소’의 관점에서 풀어낸 것은 탁견이라 생각한다. “생명은 근대의 욕망이 숙지거나 어설픈 곳, 억압과 싸움이 그친 채 고요한 텅 빈 공간의 장소화를 요청했으려니와, 김지하에게 그 출구는 ‘빈방’의 이미지로 집약되어 나타난다.”(105) 시인에게 빈방, 혹은 빈집은 역사의 중심에서 허덕이던 시인이 퇴거하는 치유의 공간이며, 중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받는 도피성과 같은 곳이다. 그 빈집의 이미지가 ‘검은 산’과 ‘하얀 방’을 거쳐 “생명을 화육시키는 생선의 공간”으로서의 틈에 이르고(114) 마침내 “풀잎의 흙과 물의 교회”인 우주적 교회에 당도한다(118). 탈주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공동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동력을 만드는 우주적 공동체. 좋지 않은가? 상처투성이인 이 땅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지점은 바로 거기가 아닐까?

 

저자와 더불어 시인들의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온 내 영혼에 묻어온 보석과도 같은 깨달음이 하나 있다. 이 과잉의 시대를 건너 새로운 언덕에 이르려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아주 소중한 삶의 원리는 ‘아주 조금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크기의 신화에 중독된 이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아주 조금만 존재하는 삶이야말로 평화와 생명의 세상을 열어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시인들에게 길을 물을 수밖에 없는 이 실존의 부박함을 한탄하다가도, 치열하게 길을 여는 시인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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