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인류의 대표로 서다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인류의 대표로 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시골길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는 두 사람이 있다. 기다림은 ‘부재’하는 것의 ‘현존’이다. 아직 그 대상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재이고,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이 이미 그를 향하고 있으니 ‘현존’이다. 부재는 고통이고 현존은 설렘이다. 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은 설렘보다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살아있음을 실감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부질없어 보이는 말을 나누거나,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두고 싸우는 것이었다. 논리도 지향점도 없는 둘의 대화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늘 비껴나가곤 한다. 그 둘의 이름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고, 그들이 기다리는 대상은 ‘고도’이다. 1952년에 출간되어 부조리극의 효시로 알려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처럼 전후의 황폐해진 삶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은유하는 바를 온전히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한 대목은 뜻 찾기에 골몰하는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1막의 말미에 등장했던 팔려가던 늙은 종 럭키의 주인 포조는 2막에서 눈이 먼 채 등장한다. 곤경에 빠진 그는 “살려달라”고 외친다. 무료함에 지쳐가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포조를 도울지 말지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블라디미르가 결론을 내리듯 말한다. 자기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니, 기회가 왔을 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는 포조의 외침이 꼭 자기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것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블라디미르의 다음 말이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지나친 낭만화라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나는 이 대목에 방점을 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곤경에 처한 사람 앞에 서게 된 사람은 인류의 대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 앞에 다가가고, 멈춰서고, 부축해 일으키고, 삶의 용기를 북돋는 것이야말로 사람됨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그가 응답해야 하는 요구의 술어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아브라함 헤셀의 말도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누군가를 돌보거나 보살필 때이다. 지난 해 여름 수해를 당한 이들을 돕기 위해 봉사단을 꾸렸을 때 다른 교회에 다니는 청년 하나가 동참 의사를 밝혀왔다. 그 기간은 마침 그가 다니는 교회의 수련회가 있는 때였다. 어떻게 교회 수련회를 포기하고 여기로 왔느냐는 물음에 그는 “물로 상처받은 분들이 있는데, 래프팅까지 포함시킨 수련회에는 도저히 참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 청년의 몸에서는 사람의 향내가 났다.

 

배우 문근영 씨의 숨은 헌신이 최근 화제가 되었다.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 그는 은밀하게, 그리고 꾸준히 거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이 아무리 냉랭해도 여전히 살만한 곳이라는 믿음을 우리 가슴에 심어주었다. 그는 예기되고 있는 경제 위기 앞에 잔뜩 움츠러든 사람들의 마음에 봄의 훈풍이 되어 다가왔다. 참으로 어여쁘고 고맙다. 그의 선행에 이데올로기적인 색깔을 덧입히려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참 딱한 이들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이란 두 해안 사이에 걸린 다리와 같다고 말했다. 해안의 한쪽은 ‘동물’의 세계이고 다른 한쪽은 ‘신성’의 세계이다. 내림길인 동물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지만 힘겹더라도 신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타고난 선인도, 타고난 악인도 아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곤경에 처한 포조에게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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