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도도새의 날갯짓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도도새의 날갯짓

 

학회 차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 모리셔스에 다녀온 교우가 볼펜과 열쇠고리 세트를 내민다. 모리셔스 지형을 본뜬 열쇠고리 한 복판에는 날개는 작고 몸집은 큰 새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지금은 멸종해버린 도도새란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 쥐 등의 동물들과 달리기 경주를 하자던 바로 그 새다. 포르투갈 선원들과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 섬에 상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섬의 주인은 도도새였다 한다. 75cm의 키에 약 25kg 정도나 되는 이 새는 언제든 먹이를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적조차 없는 이 천혜의 섬에 살면서 날개를 퇴화시켰다. 굳이 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낯선 동물이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경계심이 없는 이 새는 멀뚱멀뚱 이 외래인을 바라보다가 그만 그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불과 2백년도 지나지 않아 이 새는 멸종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 새에 붙여준 이름 ‘도도’는 포르투갈 말로 ‘바보’라 한다.

 

착하긴 한데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표현은 그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을 함축하지만, 이 말의 이면에는 언제든 남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안쓰러움이 배어있다. 세상에는 ‘귀를 틀어막은 귀머거리 살무사’와 같은 이들이 있다. 위험하고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선의를 가장하고 다가오는 이들이다. 더덜못한 사람들은 엄펑스런 그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다.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는 말씀이 더욱 적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했던 장이모우 감독이 1992년에 선 보인 영화 <귀주 이야기>가 떠오른다. 남편이 촌장에게 사타구니를 채이는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귀주의 삶은 여느 시골 여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로 남편이 앓아눕게 되자, 귀주는 촌장을 찾아가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지만, 촌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귀주는 결국 촌장을 공안에게 고발하고, 공안은 촌장에게 치료비를 물어줄 것을 명령한다. 촌장은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돈을 받으라고 말해 귀주에게 굴욕감을 안겨준다. 인간적 모욕을 받은 귀주를 촌장을 상급 법원에 고발한다. 귀주에게 필요한 것은 돈 몇 푼이 아니라 무너진 자존감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귀주는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저항하기보다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1920년대에 루쉰이 그려낸 ‘아Q’ 류와는 다르다. 분노의 기색조차 없이 불의에 항거하는 귀주의 낯은 목소리와 포기할 줄 모르는 검질긴 성정을 보면서, ‘아, 역사의 변화는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강자의 폭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이들은 일쑤 불온한 이들로 인식된다. 하지만 뻔한 잘못을 목도하면서도 혼잣소리로 불퉁거리거나 못 본 척 외면할 때 우리 영혼은 왜소해지고, 불의의 힘은 더욱 커진다. 팔레스타인의 시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마무드 다르위시가 지난 8월 9일 고단한 유랑의 삶을 끝내고 본향으로 돌아갔다. 총알을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흰나리꽃을 꿈꾸고, 새들 지저귀는 거리와 햇빛 밝은 집을 바라고, 황혼이 아니라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을 살기 원했던 그의 꿈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둠의 세월에 지친 그는 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마음뿐인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다. 그가 부른 노래는 인류의 가슴에 유랑민의 아픔과 한에 대한 기억을 새겨놓았으니 말이다.

 

사람답게 일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라며 죽기를 각오한 단식을 계속하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에게서 얼핏 귀주의 모습을 본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에서 마무드 다르위시의 절규를 듣는다. 도도새가 되기를 강요받는 이들의 가여운 날갯짓이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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