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다시 부르는 희망의 노래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다시 부르는 희망의 노래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 쓸쓸합니다. 가을 가뭄이 심해 올해는 단풍이 그리 곱지 않다지요? 그래도 예년 같았으면 졸가리만 남았을 나무에 달린 단풍들이 뒤늦게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줍니다. 단풍과 낙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이제 나이가 드는 것인가요? 눈이 순해지니 말입니다. 정동의 덕수궁길이나 광교 길을 걸으며 행복했다 하셨지요? 그런 낭만이라도 없으면 어찌 이 척박한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만나러 오시던 길에 감리교 본부 건물 옆을 지나며 보니 조용하더라고 말씀하실 때 맥쩍게 웃으면서도 가슴이 시렸습니다. 높아지려는 욕망은 진리의 무덤인데, 사람들은 왜 그리도 높아지는 일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정현종 선생의 <權座>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權座는 저주의 수렴이요

權座는 치욕의 원천이며

權座는 강력한 汚點이다

 

격문처럼 단문으로 이어진 이 시의 시적 성취는 말하기 어렵지만, 가슴에 와 박히는 충격파만큼은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이들은 대개 마지못해 그 일을 수용하더군요. 그래서인가요? 어떤 분은 그들을 ‘reluctant prophets’라고 부르는 데 그 말이 참 적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상 게으름뱅이에다가 매사에 주저주저하는 제게 그 말은 큰 위안이 됩니다. 그분의 길을 내 길로 삼겠다고 접어든 이 순례의 여정이 이미 반을 넘었는데, 여전히 갈 길은 멀고 몸은 무겁습니다. 엄벙덤벙 보낸 세월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나를 짓누릅니다. 걸어온 그 길이 어떠했는가 물으신다면, 다소 행복했고 많이 힘겨웠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나운 풍랑 속에서도 기백 잃지 않고, 우렁우렁 예수의 마음을 외치시던 큰 마음의 어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신 후에 세상은 더욱 비루한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순간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유구무언입니다.

 

성장 강박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요? 허룩해진 쌀자루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스산합니다.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교회 성장주의’라는 마법에 걸린 때문이라 하셨지요?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성장통을 앓는 아이들처럼 목회자들은 모두 교회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라느니, 영혼 구원은 교회의 존재이유라느니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 목회자들의 심층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크기에 대한 선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큰 교회에 자리가 나면 족히 백 여 통이 넘는 이력서가 몰리는 현상이 그런 심증을 확인해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요? 작은 교회로 옮겨가면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수군거리고, 큰 교회로 옮겨가면 축하한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의 서문을 읽다가 저는 ‘인간적 규모’라는 말과 만났습니다. 어떤 집단이 일정한 규모 이상이 되면 본연의 역할을 잊기 쉽다는 말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교회를 가리켜 ‘공동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서로, 함께’를 뜻하는 ‘com’과 ‘선물’을 뜻하는 ‘munus’가 결합된 말이라고 하더군요.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집단이라는 말이겠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꿈을 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결국 자기 부정의 길이고, 좁은 길이고, 십자가의 길일 겁니다. 진정한 교회 성장은 예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과 만나고, 예수의 손길로 지친 이들을 어루만지려는 마음이 우리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닐는지요? 본과 말의 뒤집힘, 이것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외부인들입니다.

 

성찰하지 않는 신앙

한국 교회의 영적 건강을 진단하는 자리에 설 때마다 저는 ‘성찰 없는 신앙’의 문제를 지적하곤 합니다. 성찰은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돌이켜보는 것일 겁니다. 그 타자란 사람일 수도 있고, 성경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돌이켜(反) 봄(省)입니다. 돌이켜 봄이란 결국 타자를 향한 열림이고, 타자의 눈을 통해 나를 보려는 노력일 겁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신앙은 ‘지성의 희생’이 아니라고 배웠지만, 현실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지성인들조차 신앙적 문제 앞에서는 성찰적 거리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터툴리아누스의 말을 사람들은 쉽게 전유해버리곤 합니다. 삶이 곤고하기 때문일까요? 대개 사람들은 질문 앞에 세워지기보다는 손쉬운 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진리는 변증법적인 삶의 과정을 거쳐가면서 확인되는 것이 아닐까요? 젊은 시절 저는 오규원 시인의 시 한 구절과 만났습니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부분

 

시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數萬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눈다고 말하면서,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회피하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흔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흔들림을 용납하지 않는 강고한 체제는 사람들 속에 허위의식을 만들어 냅니다. 믿음의 좋아 보이는 사람들의 일탈행위는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목사들이 보이는 과도한 욕망, 성적 일탈, 폭력성은 그림자를 용납하지 않는 신앙이 만들어낸 괴물들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인은 ‘왜?’라고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 <밀양>이라는 영화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작고한 소설가 이청준의 중편 <벌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작가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일치되는 않는 시대에 말들의 제집을 찾아주는 과정 가운데서 이 작품을 썼습니다. 그는 말들의 제집 찾기는 일상어의 상투성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말들, 예컨대 ‘용서’, ‘구원’, ‘화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 놓아보아 그 말들이 여전히 제값을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화 속에 비쳐진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웃었습니다. 감독이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희화화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현상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김집사는 충직하고 신실한 신자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절규하는 여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합니다. 김집사는 알암이가 살해당한 일은 우리 인간의 눈에는 슬픔뿐이지만, 거기에는 주님의 어떤 섭리가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일은 더 큰 사랑을 베푸시려는 주님의 뜻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참 듣기 불편한 말입니다. 감독은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종찬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그는 알암이 살해사건에 대해 어떤 해석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처 입은 알암이 엄마 곁에 그저 함께 있어 줍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분을 가리켜 임마누엘 곧 ‘우리와-함께-계신-하나님’이라 한 것은 참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강박

인습적인 신앙에 사로잡힌 이들이 그리는 하나님 상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 이미지가 결국 우리 삶의 모습과 내용을 결정한다고 하지요? 물론 하나님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숨기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삶이란 하나님을 늘 새롭게 발견해가는 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냈던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았다 하니, 우리가 눈과 눈을 마주하고 그분을 뵈올 날을 소망할 뿐입니다. 사람들의 경험이 다양한 것만큼 하나님을 표상하고 해석하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정의 방식(via negativa)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인들이 표상하는 하나님은 주로 잘 믿는 이에게 상을 주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벌을 주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 죄의식과 더불어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병이 든다든지,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면 신앙인들은 거의 즉시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그 일이 자신의 충실치 못함에 대한 주님의 징계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다가 벌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각인될까요? 모든 종교를 보편적인 강박신경증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찬성할 수는 없지만, 신앙이 신경증적인 모습과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어둠을 허용하지 않는 분으로 표상하는 순간 우리는 내면에 허위의식을 파종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지요?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늘 불화 속에 있습니다. 이 불화에 깃드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그것은 억압된 욕망입니다. 그림자가 짙은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에 대해 너그럽지 못합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렇기에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불편해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교인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르쉬 공동체를 세웠던 장 바니에 신부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첫 번째 이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인 까닭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어떤 일을 함께 하거나, 뭔가를 생산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신 것이 아니라, 좋은 벗들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삶을 즐기기 위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삶을 축제로 바꾸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젊은 시절 파안대소하는 예수님의 얼굴 그림을 보면서 낯설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벗이 되는 것을 기꺼워 하셨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표상하도록 하는 이들은,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풀리는 일에 매진합니다. 예배에 잘 참석하고 헌금을 정직하게 하면 하나님은 건강과 물질적 복과 더불어 자녀들의 앞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복’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이런 간단한 도식이 늘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흠잡을 데 없이 믿는 이도 실패할 수 있고, 거룩한 삶의 지향을 가진 이도 병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은 한결같이 곤고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그 절정입니다. 참된 종교는 욕망을 부풀리기보다는, 부풀려진 욕망의 허망함을 일깨우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상 시인은 인생의 말년에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은총에 눈이 떠서/세상 만물을 바라본다’면서 만물의 시원에 눈을 뜨고 보니 세상 모든 것이 기적이고, 신비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눈 하나 뜨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겠습니까?

 

私事化된 신앙을 넘어

최근 들어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목사들의 행태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사학법 개정을 요구하며 삭발하던 목사들, 바퀴달린 십자가를 지고 거리를 행진하던 모습은 코미디였습니다. 교회는 어느새 지킬 것이 많은 기득권 세력이 된 것인가요? 교회는 더 이상 문간에 있는 나사로를 돌볼 생각조차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분은 토라를 한마디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별되는 사회적 약자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계신 것 맞지요? 일자리를 잃고 거리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들, 88만원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젊은이들, 이주 노동자들, 신음하는 피조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요?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과연 자기 존재의 변화를 희구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자기 비움과 자기 초월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구에 몰려들어 먹을 것을 두고 끼룩거리며 다투는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서른 세 살의 피끓는 젊은이 예수가 겨우 우리들의 영혼이나 위로해주고, 우리들의 욕망이나 충족시켜 주려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입니까?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않는 종교인 혹은 교회는 어쩌면 사회 발전의 장애요인이 되는 것 아닐까요? 싸구려 속물주의, 소비주의 문화, 이익과 권력에 대한 탐닉, 명성에 대한 동경 등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런 가치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다면 대체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또 이루기 위해 투신하지 않는 교회, 생명의 존엄함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 교회는 혼이 없는 육체인 좀비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이 너무 과한가요?

 

벌써 25년이 되었네요. 그해 봄 젊은이들의 부활절 연합예배가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렸습니다. 설교자는 변선환 박사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준비해온 설교 원고를 설득력있는 음성에 담아 읽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대목에 이르자 선생님은 갑자기 원고에서 고개를 들고는 가만히 회중석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러시나 모두가 의아해 하는 순간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한국교회를 증오합니다.” 갑작스런 외침에 놀란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해를 많이 받는 분이 어찌 저런 말씀을 하실까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음 순간 선생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 한마디는 어떤 가르침보다도 더 분명하게 선생님의 진정을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때가 떠오르는 까닭은 지금의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선뜻 제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여전히 교회의 현실은 어지럽기만 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할 시간도 열정도 없는 목사들은 은혜를 빙자하여 공포를 주입하고 욕망을 부풀리기에 열심입니다. 삶에 지친 이들은 성찰을 꺼리면서 이미 주어진 상투적인 고백에 안주합니다. 교회의 양극화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럴수록 세상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합니다.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 제목 그대로 교회가 ‘당신들의 천국’이 되는 순간, 촛불은 옮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울면서라도 가야할 길이라면, 그 길을 끝까지 가야하겠지요. 돌팔매질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더라도 그를 통해 우리가 달라질 수 있다면 고마운 일입니다. 돌에 맞고 거친 손길에 꺾인 자리에 빗물이 흘러들어 생긴 상처를 고운 무늬로 바꾸는 먹감나무처럼, 우리들에게 그럴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구할 뿐입니다.

 

겨울의 초입에서 그래도 넋두리를 쏟아놓을 수 있는 분이 계셔 행복합니다. 교회라는 흙탕물을 정화하기 위해 늘 그 한복판에 뛰어드는 벗님이 있어 다시금 희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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