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무르익은 사람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무르익은 사람

 

누렇게 물들어가는 들판이 참 고즈넉한 가을이다. 여전히 무더운 어느 가을날, 도시의 분잡에 시달리다가 달아나듯 찾아간 농촌 마을에서 들판의 고요와 만났다. 억새 코스모스 쑥부쟁이 꽃향유 마타리가 지천으로 깔린 야산을 만유하다가 문득 들어선 들판, 그곳은 신전처럼 장엄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흔들리는 벼들의 리듬은 몸에 깃든 조급함을 잠재우고, 햇빛을 머금은 듯한 노란빛은 마음에 깃든 푸른 색 우울을 씻어주었다. 결코 범람하지 않는 노란빛 신전에 들어, 오체투지하듯 천천히 나아가는 순간 말은 절로 사라지고 은총과도 같은 고요함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 가르는 말에 베이고, 쏘는 말에 찔려 피 흘리던 마음이 아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들판에 쪼그리고 앉아 거풍하듯 마음을 여는 순간 꿈꾸듯 백석의 시 <삼천포>가 떠올랐다. 물론 그 시는 초봄의 정경을 그리고 있지만, 그의 마음이 드러내 보이는 진경은 탈시간적이다.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해바라기하기 좋은 마당에 볏짚같이 누런 사람들이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더러는 말다툼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안장을 진 소는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 중인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시가 떠오른 까닭은 마지막 연 때문일 것이다. ‘아 모두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이 구절이 너무나 좋다. 고단한 현실을 낭만화한다고 탓할 것 없다. 모두가 가난하기에 가난조차도 따사로울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 중뿔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지만 함께 장엄세계를 이루는 들판에 들어보면 알 것이다. 우리의 작음을, 그리고 속됨을.

 

세상이 온통 지뢰밭이다. 어느 한 순간 방심하다가는 어떤 일을 겪을지 도통 알 수 없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호흡은 가빠지고 가슴은 비좁아진다. 정치를 보아도 경제를 보아도 종교를 보아도 숨이 가지런해지지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나를 잊을 수 있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아지는 얼굴을 보고 싶다던 함석헌 선생의 탄식이 절실해진다. 목소리 큰 사람,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사람의 향내가 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세상은 전쟁터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통로인 언어는 불통의 도구로 전락했고, 공론의 장은 공교한 말, 망령된 말, 냉소의 말들로 난장을 이루고 있다. 육체를 입지 못한 말들이 유령처럼 떠돌며 깃들 곳을 찾고 있는 세상이다. 군자가 사라진 자리에 소인들만 들끓는다. 일찍이 시인 조정권은 이런 시대를 이렇게 탄식했다. “아녀자가 기른 蘭에도 향기가 없고/대장부가 기른 竹에도 기품이 없다/세상 온 구석에/뼈를 찔러넣는 寒氣마저 없다.”(산정묘지․6)

 

남명 조식은 스스로를 경계하고 늘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 몸에 성성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 한다. 방울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살피고, 자기가 선 자리를 가늠했으리라. 그런 결곡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의 삶과 글에는 향기와 기품과 한기가 서려 있었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으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조차 이런 모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이 시대의 비극이다. 각 교단의 지도자들을 뽑는 선거철마다 들려오는 저 참담한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언젠가 잡지에서 보았던 삽화가 삼삼히 떠오른다. 땅콩 줄기에 몇 개의 땅콩이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는 이미 떨어진 땅콩들이 흩어져 있다. 삽화가는 그 밑에 이렇게 썼다. “덜 떨어진 놈”. 무릎을 치며 웃었지만 가슴이 시렸다. 놓아야 할 것을 놓지 못하는 것이 우리 영혼의 병통이다. 황금빛 가을 들판에서 경험했던 그 치유의 느낌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겠다. 노란빛은 결국 ‘익은’ 빛이었던 것이다. 해바라기나 호박 심지어는 붉게 물들어가는 감이 주는 안도감은 익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르익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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