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자연재해를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자연재해를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침대에 오르고 밥그릇에 오르고, 이와 파리와 메뚜기가 들끓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우박이 쏟아져 내려도 바로는 여전히 귀 먹은 자로 살았다. “조금 괴롭군. 하지만 별 일이야 있겠는가?” 그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땅을 뒤덮고 마침내 장자와 맏배를 잃은 가족들의 호곡소리 낭자할 때에야 비로소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챘다. 열 번의 재앙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출애굽기는 거듭해서 바로가 고집을 부렸다고 말한다. 고집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 의견을 굳게 지킴’이다. 그렇게 본다면 바로는 누군가의 견해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인이다. 문제는 그의 ‘의견’ 혹은 ‘입장’이라는 것이 어리석음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자만심은 억지 견해인 ‘독사’(doxa, 臆見)를 참된 인식(episteme)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근대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정신적 의미에서 바로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도무지 하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니 말이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16:3) 예수님의 탄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거의 다 사라지고, 사람들이 남태평양의 낙원이라 부르던 투발루가 점점 물에 잠겨들고, 북극곰과 펭귄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풍요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눅17:27) 사람들이 우매했던 선사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풍요의 환상’이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이후 사람들은 하늘을 잊었다. 이따금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환경현안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 사태를 주시한다.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그리고는 늘 그렇듯이 이전의 삶을 계속한다.

 

지난 해 12월 우리는 국내 최악의 해양오염 사고를 경험했다. 유조선인 허베이 스피릿호와 삼성중공업 소속의 해상 클레인 예인선이 충돌해 일어난 원유유출 사고는 전 국민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영원히 청정할 것만 같았던 바다의 신음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름을 뒤발한 고둥과 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벅이는 뿔논병아리의 서러운 눈을 본 사람들의 은결든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조가비처럼 해안에 엎드려 조약돌 하나하나를 닦아내면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닦아야 할 것은 기름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드리운 더러운 욕망임을 조금은 자각했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이런 참극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회비용을 허비한 사람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꿀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베이컨에 의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의 표상으로 등장했던 꿀벌들이 집단으로 폐사한 장면을 보여주는 화면을 보면서 대개는 고개를 갸웃하고 지나간다. 그 꿀벌들이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식량은 벌들의 수분활동을 통해 얻어진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벌들의 폐사 장애(Colony Collapse Disorder)는 식량 생산의 감소라는 결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가뜩이나 국제 곡물가가 폭등하면서 세계 도처에서 식량 폭동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서 벌들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을 알리는 서곡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벌들의 폐사가 인간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벌들의 폐사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후변화나 전자파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인 것 같다. 꿀벌들이 살 수 없는 세상은 사람도 살 수 없음을 이 사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미얀마에 불어온 사이클론으로 말미암아 13만 명이 희생되었고, 중국의 쓰촨성을 강타한 지진도 수많은 사람들을 인신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래저래 사람들의 가슴에는 둠즈데이(doomsday)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건 그저 늘 있는 자연재해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그런 예단을 가로막는다. 재해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그 발생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독백하듯 말한다. “헉 정말 지구가 뿔났나?”

 

국경을 넘는 조류 독감(avian influenza)의 공포도 점점 확산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AI가 중세의 흑사병처럼 인류에게 큰 재앙을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예고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전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둘러싼 공방으로 뜨거웠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었던 것은 검역주권을 확보하라는 요구였다. 쇠고기 문제는 환경문제가 더 이상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교육시켰다. 안전한 먹을거리를 먹겠다는 국민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그러나 거기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우리의 식생활이 과연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제는 일정 부분 금지되었다고는 하지만 비육우를 만들기 위해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고, AI에 감염된 혹은 감염이 우려되는 가금류들을 살처분하는 문명이 과연 인간적인가? ‘살처분’(殺處分)이라는 섬뜩한 표현 속에서 우리 문명의 그림자를 본다면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까?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이웃 사랑이야말로 참된 삶의 표지임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먹는 행위 그 자체도 윤리적이어야 한다. 지금 전 세계의 소의 사육면적은 전 세계 토지의 약24%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도 목초지 개발을 위해 사라지는 숲의 규모가 엄청나다 한다. 간단히 말하자. 우리가 맛있는 쇠고기를 씹어 삼키는 동안 가난한 나라의 누군가는 굶고 있다. 신앙적, 도덕적 결단이 필요한 것은 이 지점이다. 육식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해도, 조금 덜 먹는 방향으로 삶을 돌이킬 수는 있지 않은가? 이웃 사랑의 길은 참으로 다양하다.

 

자본주의 질서가 만들어낸 욕망의 미로에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안다. 생산-유통-소비의 메커니즘을 추동하는 광고는 우리에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를 가리켜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의 매트릭스 속에 갇힌 이들은 상품을 소비하기보다는 기호를 소비한다. 사람됨이나 관계맺음의 능력이 아니라, 그를 치장하고 있는 기호가 한 사람의 생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피곤하다. 좋은 차와 넓은 집, 학벌에 탐닉하는 동안 우리 영혼은 점점 납작해진다. 비상을 잃어버린 영혼이 어슬렁거리는 도시에 타락과 폭력이 가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개발론자들이 불어대는 풍요의 피리소리에 이끌리다 문득 벼랑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급격한 기후 변화와 피크 오일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야 할 때이다.

 

이제는 대안적 삶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에너지 과다 소비로 상징되는 오늘의 삶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다. 나라마다 온실가스 감축에 비상이 걸렸다. 작년 12월 발리에서 열린 13차 기후변화협약에 참석한 개도국 대표들은 발리 로드맵을 통해 “측정 가능한 감축 목표”를 세우고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나가기로 했다. 유엔 프로세스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가별 감축 목표를 설정과 의무부담을 통한 적극적인 감축활동을 촉구하고 있다. 에너지 수급에 비상이 걸린 우리나라도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그 방향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어쨌든 정부는 최근의 고유가 사태와 관련해 ‘녹색 성장론’을 제시하고 있다. “기름을 덜 쓰고 탄소를 덜 배출하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은 맞는데, 그것이 실효성 있게 추진될는지는 더 지켜보아야 한다. 문제는 최근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이런저런 정책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이런 문제가 풀릴 수 없다. 점점 가혹해지는 삶의 환경은 사회적 연대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게 마련이다. 연대감의 해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은 ‘묶다, 구속하다, 결합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religare’에서 유래한다. 종교는 의례와 이야기, 공동 의식, 상징 등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종교는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는다. 그 끈은 ‘사랑’과 ‘배려’이다. 어느 신학자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존재라고 말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인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기에 세상을 오불관언의 태도로 대할 수 없고,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세상을 초월적 시선으로 조감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인식의 언어라기보다는 고백의 언어이다. 즉 창조주를 고백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만물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담론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뜻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 만물 속에는, 그리고 자연의 질서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닿아 있다. 세상은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차 있다는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말이 가리키는 바가 이것이다. 자연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또 하나의 텍스트이다. 자연과 우주적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창조 세계의 특색은 다양성이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초목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없어도 좋을 것은 없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창2:15). 여기에 사용된 두 개의 동사는 매우 중요하다. 그 첫 번째 동사 르오브다(le'ovdah)는 ‘봉사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자 종이다. 두 번째 동사 르숌라(leshomrah)는 ‘보호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재산을 관리할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임의로 왜곡하거나 착취할 수 없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시24:1). 성경을 바로 읽으면 인간중심적 태도의 토대가 허물어진다.

 

하나님은 흙으로 빚어 만드신 모든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바는 무엇일까? 어느 랍비는 아담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걸작품들을 보며 ‘경탄’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이런 놀람을 잊어버린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휘황한 불빛이 달빛과 별빛을 가리듯이, 풍요로운 삶은 우리에게서 ‘경탄’을 앗아갔다. 구상 시인은 <은총에 눈이 떠서>라는 시에서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은총에 눈이 떠서/세상 만물을 바라본다.//지척도 분간되지 않던 無明 속/어둠의 허깨비들은 스러지고/쳇바퀴 돌듯 되풀이하던/목숨의 시간들이/신비의 샘으로 흐른다”고 노래한다. 무심히 눈에 스치던 자연의 생성과 소멸이 이적처럼 느껴지기까지 너무나 긴 세월이 걸렸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성경은 하나님-인간-자연이 밀접한 인과관계 속에 있음을 거듭해서 증언하고 있다. 인간의 죄는 땅의 저주로 이어졌고(창3:17-18), 가인의 죄로 인해 땅은 더 이상 효력을 나타내지 않게 되었다(창4:12). 예언자는 땅이 황무지로 변한 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겔15:7)라고 말한다. 희망은 없는가? 아니, 있다. 성경은 사람이 규례를 지키면 땅은 소출을 내고, 나무들은 열매를 맺을 것(레26:4)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사32:15)이라고 말한다. 이런 조응관계를 가장 탁월하게 보여주는 것은 호세아이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호2:21-22)

 

하나님의 은총은 양면적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적색 은총과 녹색 은총이라 구별했다. 녹색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을 말한다. 녹색 은총이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보편적 은총을 말한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 우리는 녹색 은총 속에서 살아간다. 생태주의자 예수는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은총은 하찮아보이는 것 속에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은총이 망각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녹색 은총에 눈을 뜬 사람은 ‘독차지’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큰 교만인가를 안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제’를 추구한다. 녹색 은총에 눈을 뜬 사람은 소유와 지배와 정복의 관계를 넘어 연대와 협력과 교감의 능력을 형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극심한 기후 변화로 자연 재해가 빈발하고,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소식들이 들려오는 때, 녹색 은총을 상기시키는 것은 한가한 사람의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생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는 때이다.

 

교회는 대안적 세상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부풀려진 욕망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이집트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닦아야 한다. 경쟁보다는 우정을, 풍요보다는 절제를, 시장적 가치보다 비시장적 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세상 말이다. 교회의 본질적 가치로 회자되고 있는 ‘코이노니아’는 신앙과 우정에 바탕을 둔 공생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교회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다. 홍수와 무지개 사이에서 살고 있는 교회는 환경 친화적 삶, 곧 생태학적 발자국을 가급적 적게 남기는 생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할 일이다. 사회적으로는 자족적인 과학의 오만을 경계하는 일부터, 환경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개발을 반대하는 일은 생명 지킴이가 되어야 할 교회의 마땅한 사명이다.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이들과 연대하면서 에코 밥상을 차리고, 자연학교 혹은 유기농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여 자라나는 세대로 하여금 생태학적 감수성을 갖도록 돕는 것도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교회를 건축할 때도 친환경적인 공법을 택하고, 햇빛 발전소를 설치하여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는 것, 이산화탄소 저감을 위해 큰 차에서 내리는 것, 가급적이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자전거 타기를 생활화하는 것도 세상을 돌보기 위한 아름다운 실천이 될 수 있다.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자연재해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하다. 하지만 생태적인 삶의 실천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호소하는 기도이다.

 

베수비오 산 밑에서 살아가던 폼페이 시민들은 연기를 내뿜는 산을 바라보면서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을 맞이하였다. 지금 우리의 형편도 다르지 않다. 당신이 만드신 세상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하나님도 끙끙 앓고 계시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피조물과 사람들을 품에 안고 뜨거운 정과 사랑으로 보살피시느라 신음하시는 야훼 라카민(Yahweh Rachamin)이시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아픔을 덜어드리기 위해 마음 쓰는 새로운 인류의 출현을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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