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착한 이가 부르는 착한 노래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착한 이가 부르는 착한 노래

― 홍순관,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팔레스타인의 양심으로 불리웠던 나지 알 알리의 카툰에는 늘 한달라(Hanzala)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이름의 뜻은 아랍어로 ‘쓰라림’이다. 맨발에 누더기 옷을 걸친 그는 늘 분쟁의 현장이나, 고통의 현장을 서성인다. 그는 대개 뒷짐을 진 모습으로 서 있기에 사람들은 그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그는 무심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억눌린 함성의 형상화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도 뒷짐을 풀고 역사의 현장에 뛰어든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못 박힌 손을 들어 저 어두운 어딘가를 향해 돌을 던질 때 그는 십자가 뒤에서 돌을 주워주기도 하고, 총검을 쟁기 삼아 척박한 땅을 갈아엎으며 사랑의 씨를 뿌리는 농부들을 위해 기꺼이 멍에를 메기도 한다. 철창 속에 갇힌 이의 퀭한 눈앞에 화분 하나를 놓아주기도 한다. 그의 카툰에 등장하는 꽃은 대개는 데이지꽃인데 그 꽃말은 순결이라고도 하고 평화라고도 한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대지 위를 맨발로 걷는 키 작은 한달라, 그는 좀처럼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고통의 현장에서 벗어나 달아나는 법이 없다. 그가 철창 앞에 놓아주는 화분에서 자라난 데이지꽃 그 가녀린 줄기로 철창을 가르기도 한다. 한달라는 나지 알 알리의 분신일 것이다.

 

홍순관의 책을 읽은 감상을 적어야 하는 이 순간 왜 나지 알 알리의 카툰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한달라와 홍순관은 팔레스타인과 한국이라는 경계를 넘어 이미 정신적으로 내통하고 있기 때문일까? 홍순관은 맨발로 세상을 걷는다. 거칠고 삭막하고 더넘찬 현실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갑각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부드러움은 늘 위태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는 불꽃을 밟으면서도 발을 데지 않는 사람처럼 가뿐하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나지 알 알리의 ‘데이지꽃’이다. 그것은 절망에 틈을 내는 끈질긴 힘이요, 짙은 어둠 속에서 비쳐온 별빛이다. 그가 냇물을 향해 ‘힘을 내거라 바다로 가야지’라고 외칠 때, 끊겼던 물줄기가 돌연 이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과장이 아니다. 내 가슴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모를까. 그 힘, 그 별빛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를 읽는 순간 모든 것이 자명해졌다.

 

끊긴 물줄기조차 다시 흐르게 하는 그 힘, 어둠을 꿰뚫고 섬광처럼 가슴에 쏟아지는 그 별빛의 뿌리는 하늘이었다. 그는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는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19:3-4)고 히브리 시인이 노래했던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바람 소리, 계절이 지나가는 소리, 세상의 작은 것들에 귀를 대고 있다. 홍순관은 해 긴 윤사월, 문설주에 기댄 채 꾀꼬리 울음소리를 엿듣는 박목월의 눈먼 처녀를 닮았다.

 

꽃이 열리고

나무가 자라는 소리

너무 작아

듣지 못했습니다

(<소리> 전문)

 

듣지 못했다는 말이 참 좋다. 이것은 꽃이 열리고 나무가 자라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은 이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 소리 없는 소리를 이렇게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하늘의 비의를 엿듣는 이에게 삶은 신비 그 자체이다. 한 잔의 물속에서 그는 별을 보고, 산을 보고, 태양을 보고,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듣는 사람, 혹은 보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다. 그에게는 해질녘에 모래톱에 누워 별을 헤는 것도, 동네를 걸어서 한 바퀴 도는 것도,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는 것도, 뜰에 듬뿍 물을 주는 것도, 아이에게 져 주고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것도, 노을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것도, 낙엽을 쓸거나 눈사람을 만드는 것도(<이런 것들을 못 해 보았다면>) 모두 성스러운 일이 된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 살기에 모난 세상은 너무 무섭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고 말했던 홉스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문제는 ‘나’도 그 야수적 ‘인간’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남에게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것이 우리 삶이건만, 가시는 늘 상대편에게 있다고 상정하고 사는 동안 우리는 점점 모난 돌처럼 변한다. 책상 위를 걸어가는 개미 한 마리를 무심코, 태연하게 검지로 꼭 눌러 죽이고는 평화의 노래꾼은 화들짝 놀란다. 자신의 무지하고도 날렵한 행동에 숨이 멎었기 때문이다(<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무너진 마음이야말로 황무지가 아닌가? 황무지 주민들이 만드는 세상은 점점 예각으로 변해간다. 예각은 일쑤 흉포한 쇠붙이로 변해 누군가를 찌른다. 인간들이 빚어내는 살풍경 때문에 세상은 숨이 가쁘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굴뚝에서 쉼 없이 뿜어내는 폭력으로 인해 자연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어찌 해야 하나? 울어야 한다. 바위 무게보다 더하게 짓누르는 자아에 대해 울고, 숨을 헐떡이는 세상을 위해 울어야 한다. 칭얼거리는 울음이 아니라, 자아라는 쇠 감옥을 찢어내고 싶은 마음에서 울려나는 비통한 울음, 그 울음을 우는 이가 착한 세상을 만든다. 현실은 울음 없이는 정화할 수 없다. 홍순관은 착한 세상은 애가哀歌처럼 빛난다고 말하지만(<착한 자화상>), 나는 이것을 뒤집어 애가를 부르는 사람만이 착한 세상을 만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애가를 부르는 사람의 마음은 흙을 닮는다. 흙의 시간은 느림이다. 그래서 흙의 리듬을 타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흙처럼 일하는 농부도,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계절도,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냇물도 영악한 눈으로 보면 다 어리석다. 그러나 하늘 버리고 땅에 내려온 이만큼 어리석은 이가 또 있을까?

 

가만가만 말하는 홍순관의 어조에 결기가 서리는 것은 그 어리석은 이를 따른다는 이들의 가당찮은 행태에 눈길이 닿을 때이다. 어리석은 포식으로 배가 불러 날지 못하는 새, 먹을 것이 많아 고향으로 돌아갈 이유를 잃어버린 새, 텃새가 되어 버린 철새, 그는 그 새에게서 덩치만 커진 비대한 교회를 본다(<게으른 새>). 변질이다. "하나님이 들어와 숨을 쉬고/예수는 들어와 춤을 추는"(<교회는>) 교회, 우리 손목을 잡아 관습의 바깥으로 데려가는 예수(<밖으로 데려갑니다>)를 침묵시키는 교회, 제 몸 몰라 세상을 다 안으셨던 예수를 망각해버린(<한 몸이니>) 교회는 희망 제작소가 아니라, 절망의 뿌리이다. 하지만 어두운 세상에서는 절망조차도 사치이다. 내일의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강물로 몸을 던졌던 눈송이들이 깊은 강 되어 흐르듯이, 우리가 겪는 아픔조차 탄탄한 생의 길로 삼아 걷는 것(<이미…었어요.>), 그것이 인생 아니던가?

 

착한 사람은 착한 노래가 만든다고 말하는 평화의 노래꾼 홍순관이 흙처럼 고운 숨결을 불어넣은 이야기는 서붓서붓 우리 가슴에 파고든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 파랑 바람이 불게 한다. 그 일렁임이 결코 만만치 않다. 언어의 경제성을 터득한 이의 조용한 속삭임이 목청 큰 이의 사자후보다 강렬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글은 일깨워준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누구나 조금은 착해질 수밖에 없다. 착한 사람이 만드는 착한 세상의 꿈, 그 꿈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이의 꿈과 잇닿아 있기에 허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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