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진정성만이 해답이다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진정성만이 해답이다

 

집에서 가까운 찻집에 걸려있는 사진 한 장이 마음을 툭 치고 지나간 후, 좀처럼 그 영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흑인 소년의 얼굴이다. 나이는 13-14살 쯤 되었을까? 코허리와 뺨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꽤 오랜 시간을 붙박이로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 같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나는 소년의 짓눌린 함성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의 눈가에는 흐를 듯 말 듯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궁금하지만 그의 표정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살짝 흐려진 그의 눈망울에 맺힌 상은 저간의 사정을 짐작케 해준다. 성인 몇 사람이 그를 향해 서 있다. 그들 앞에는 관처럼 보이는 물체가 보인다. 아하, 소년의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구나. 테러로 인해 희생당한 것일까? 아니면 질병으로? 사진작가에게 묻지 않아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사진은 우리 기억의 지층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는 상실감과 슬픔을 상기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말했다. 역사의 슬픔을, 그리고 이웃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받아들일 때, 나의 슬픔을 나만의 것으로 전유하지 않을 때 세상은 조금은 따뜻한 곳으로 바뀔 것이다. 그 소년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한 가지 소망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누군가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그리고 내가 머무는 삶터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꿈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이웃들이 물끄러미 혹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의 소요이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개방에 반대하며 조용히 타오르던 촛불이 언제부터인가 분노의 촛불로 바뀌고 있다. 웃음과 노래와 유머와 창의적 아이디어와 즉석 토론이 넘치던 광장은 돌연 긴장감이 감도는 전장으로 바뀌고 있다. 할 만큼 다 했다는 정부와, 검역주권의 확보 없는 협상은 원천 무효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뒤엉키고 있다. 한쪽에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빨갱이' 혹은 '좌파'라는 해묵은 찌지를 붙이려는 이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비폭력 저항의 효과에 대한 회의에 빠진 이들이 있다. 갈등을 부추기는 언어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정치인, 지식 상인들, 종교인들이 있다. 마침내 돌이 날고, 물대포와 소화기 분말이 난사되면서 불신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어찌 해야 할 것인가?

 

6월의 염천 아래서 이명처럼 들려오는 선지자 호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에브라임이 다시 태어나는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그는, 때가 되었는데도 태를 열고 나올 줄 모르는 미련한 아들과도 같다.” 진통을 겪으면서도 새 역사를 탄생시킬 힘이 없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비극이 아닌가? 정부가 시민들을 누군가의 왜곡과 선동에 넘어간 무지한 대중, 계몽이 필요한 객체로 보고, 시민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을 때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은 헛된 고통이 될 것이다. 정부와 시민 사회의 충돌이 빚어내는 파란 불꽃 한 점도 허비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이저>>에서 부루터스는 “겸손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야망에 불타는 사람의 사다리여서, 사다리를 올라갈 땐 얼굴을 위로 향해 올려보지만 막상 꼭대기에 다 오르고 나면 단번에 사다리에 등을 돌려 버리고 더 높은 구름을 쳐다보며 자기가 올라왔던 발 밑 계단을 깔보기 일쑤”라고 말한다. 시이저의 통치에 대해 회의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국민들은 자기들을 내려다보는 정치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다른 데 없다. 국민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소통의 언어를 찾기 위해 낮은 자리로 내려서야 한다. 잘못한 것은 시인하고, 오해는 풀어야 한다. 지향이 왜곡될 때는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바탕은 진정성이다. 으르댐으로는 절대로 난국을 풀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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