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한 사람의 혁명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한 사람의 혁명

 

짓노란 달맞이꽃 옆으로 양달개비 푸른 꽃이 고개를 숙인 채 햇빛을 피하고 있다. 진딧물과 개미에게 시달리면서도 기어이 꽃을 피워냈던 함박꽃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 큰 꽃잎을 떨구고 말았다. 사열하듯 살피꽃밭을 돌아보고 있는데, 오 놀라워라. 팔순의 할머니가 집에서 옮겨 심어놓은 어린 대추나무가 기어이 초록빛 꽃망울을 매달고 있다. 몸살을 심하게 해서 올해는 꽃을 피우기 어렵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참 고맙고 대견했다. 집으로 가는 길, 어느 대학 담장 너머로 수백 송이의 장미꽃들이 물끄러미 세상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이들이 밝혀든 촛불을 생각했다. 그것도 역시 역사가 피워낸 한 송이 꽃인가? 그동안 일부 중앙 일간지들은 쇠고기 수입 협상을 철회하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선동’, ‘사주’, ‘불순’, ‘괴담’이라고 색칠해왔다. 정부는 ‘소통의 부재’를 들먹였다. 다중의 소리를 비판적 사유가 부족한 이들의 억견으로 폄하하는 것인가? 결국 정부는 마침내 미국산 쇠고기 위생조건 고시를 확정 발표했다. 굴욕적 협상을 철회하라는 시민들의 함성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이라던 히브리 시인의 그 절절한 염원이 아리게 다가와 발걸음이 절로 느려졌다. 지천으로 떨어져 발에 밟히는 오디가 슬프다. 5월과 6월 사이, 하수상한 세월 속에서도 절후는 어김없이 왔다가 가건만 바스대는 마음을 붙들어 맬 데가 없다.

 

함께 걷던 곁님이 문득 탄성을 발한다. "어머, 고추 꽃 피었네. 꽃이 피면 지지대를 세워줘야 하는데." 겨우 십 평방미터 쯤 될까 싶은 공터에 고추와 상추가 몇 고랑씩 심겨져 있었다. 제법 농사꾼 같은 소리를 한다고 했더니, 아버님 덕분이라고 했다. 도시의 외곽에 사실 때나, 아들과 함께 전방 부대의 관사에 사실 때나 아버지는 자투리땅만 보면 뭔가를 심으셨다. 농부로 살아온 삶의 관성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가 심은 토마토는 실했고, 고추도 튼실했다. 동네 사람들은 무람없는 상찬으로 값을 대신 치르고는 그 열매를 즐겁게 나누어 먹었다. 곁님에게 아버지가 그렇게 채소를 잘 가꾸셨던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건 지극정성이라 했다. 조석으로 밭에 나가 물을 주고, 밴 데는 솎아주고, 곁순은 잘라내고, 벌레를 잡아주고, 거기에 더해 두런두런 이야기까지 나누셨다는 것이다. 지극정성으로 돌보려는 마음을 빼놓고는 인간다움을 생각할 수 없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다른 생명이든 간에 말이다. 이 마음을 잃어 우리는 풍요롭지만 가난뱅이로 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의료 민영화, 공기업의 민영화가 예견되는 상황 속에서 숯덩이로 변해 버린 농부들과 빈곤층의 시린 마음을 누가 헤아려 줄까? 설 땅이 점점 사라져 절망의 심연 앞에 서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 노동자들의 마음을 보듬어 안아줄 이는 누구인가? 교회를 짓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살피라던 선각자의 말이 쇠북소리처럼 쟁쟁하다. 이 말은 정치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사람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읽다가 ‘한 사람의 혁명’이라는 말에 붙들렸다. 깊이 각성된 한 사람이 검질기게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길은 비록 좁지만 종국에는 생명 세상과 통하게 될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식물에 물을 주고, 염천을 마다하지 않고 밴 것을 솎아내고, 벌레를 잡아주는 농부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혁명가가 아닌가? 누구는 그런 이를 가리켜 최초의 인간이라 했고, 하늘의 빛과 만나 눈이 밝아진 바울은 그런 이를 가리켜 새로운 아담이라 했다. 시절은 바야흐로 새로운 아담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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