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정성으로 2009년 05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정성으로

 

에덴동산 한복판에는 생명나무가 서있었다고 합니다.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마치 기도하듯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져 어느 문화권 속에서나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우주수(宇宙樹)로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동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 한 그루, 그것은 동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자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입각점입니다.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는 나무 한 그루가 우리 가슴에 심겨져 있다면 삶은 한결 든든해질 겁니다.

 

마음으로 좋아하는 어느 선생님은 만일 나무가 되라 하면 산 위의 낙락장송이 되기보다는 다른 나무들과 어깨를 겯고 숲을 이루고 싶다고 했습니다. 남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는 못해도, 서러운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다면, 작고 여린 새들의 품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도에 가면 반얀나무(Ficus benghalensis) 숲을 볼 수 있다네요. 뿌리가 약한 반얀나무는 비바람을 견뎌내기 위해 제 가지에서 다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특이한 습성이 있는데, 땅에 닿은 뿌리는 기둥뿌리(支柱根)가 되어 나뭇가지를 받쳐준답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 그루 반얀나무는 숲 전체를 이루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숲이 더 푸르러지고, 그윽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가끔 산에 오르면 세찬 바람에 넘어진 나무를 봅니다. 가로로 누운 나무를 보는 것은 안쓰러운 일입니다. 그간 견뎌온 세월의 무게가 얼마인데 저렇게 자기를 놓아버렸나 싶기 때문입니다. 가로로 누워 뿌리를 드러낸 나무를 봅니다. 원뿌리는 보이지 않고, 곁뿌리만 무성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 한 방울을 찾기 위해 어두운 땅을 더듬어 내려가지 않아도 좋았기 때문일까요? 때로는 좋은 환경이 복이 아닌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더러는 흙이 파이고 깎여 뿌리가 밖으로 드러난 나무도 보입니다. 그 뿌리가 곧 나무의 안간힘인 줄 알기에 가슴이 짠해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 뿌리를 짓밟고 무심히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뿌리에 흙 한 줌을 덮어주고 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 부임하게 된 목사가 있었습니다. 이삿짐을 내려놓자마자 그는 예배당 문을 열었습니다. 주인에게 인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햇살이 비쳐드는 예배당은 뽀얀 먼지로 덮여 있었습니다. 벌써 오랫동안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예배당 청소를 대충 마치고 뒤꼍으로 나가자 무너진 둔덕 중간쯤에 채 30cm도 되지 않는 작은 소나무가 보였습니다. 흙이 빗물에 깎여 내려서인지 나무는 뿌리를 드러낸 채 고사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목사는 그 나무에게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대나무 몇 대를 가져다가 그 소나무 주변에 박아놓고 흙을 채웠습니다. 물을 떠다가 뿌려주면서 그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아슬아슬한 희망’. 그는 소나무가 자라 그늘을 드리우는 날을 내다보며 날마다 물을 주었습니다. 어느 결에 그의 가슴의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영화감독인 타르코프스키는 <<순교일기>>라는 책에서 사막교부들이 전해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줍니다. 파반다 출신의 파베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승이 한번은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산 위에 흙을 파고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요한 콜로그에게 이 앙상한 나무에 매일 한 동이씩 물을 주되 나무에 다시 열매가 맺힐 때까지 주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물가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저녁 때 다시 돌아오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나무는 싹이 나기 시작했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노수도승은 열매를 따 교회의 수도자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서 이리들 와서 순명(順命)의 열매를 맛보도록 하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영악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의 열매도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의 열매일 겁니다.

 

겨울산에 가면

밑둥만 남은 채 눈을 맞는 나무들이 있다

쌓인 눈을 손으로 헤쳐내면

드러난 나이테가 나를 보고 있다

들여다볼수록

비범하게 생긴 넓은 이마와

도타운 귀, 그 위로 오르는 외길이 보인다

그새 쌓인 눈을 다시 쓸어내리면

거무스레 습기에 지친 손등이 있고

신열에 들뜬 입술 위로

물처럼 맑아진 눈물이 흐른다

잘릴 때 쏟은 톱밥가루는 지금도

마른 껍질 속에 흩어져

해산한 여인의 땀으로 맺혀 빛나고,

그 옆으로는 아직 나이테도 생기지 않은

꺾으면 문드러질 만큼 어린것들이

뿌리박힌 곳에서 자라고 있다

도끼로 찍히고

베이고 눈 속에 묻히더라도

고요히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눈을 맞으며 산에 들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바라보는

나이테가 있다

 

나희덕 시인의 <겨울산에 가면>입니다. 아무 말도 덧붙일 수가 없네요. 그냥 이 시를 가슴에 담아두고 싶습니다. ‘도끼로 찍히고/베이고 눈 속에 묻히더라도/고요히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청파교회는 이런 교회여야 합니다. 100년의 나이테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네요. 100년 된 나무가 살기 위해서는 매년 여린 잎을 피워내야 합니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이의 정성으로 생명과 평화의 잎을 피워낼 이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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