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질서와 혼돈 사이 2009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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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혼돈 사이

 

남해의 임금은 숙이고 북해의 임금은 홀이며,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다. 어느 날 숙과 홀이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후한 대접을 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 논의를 했다. 둘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사람에게는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호흡할 수 있다. 하지만 혼돈에게는 구멍이 없으니 그에게 구멍을 뚫어 주자.” 둘은 날마다 혼돈의 몸에 구멍 하나씩을 뚫었는데, 7일이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장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숙과 홀이 혼돈을 위한다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는 혼돈을 죽이고 말았다. 장자의 이 이야기는 인간의 작은 지식이 온생명을 해칠 수도 있음을 엄중하게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이라크 전쟁이나 개발에 따른 환경파괴는 이 이야기의 현대판 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은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세계를 재구성하고 싶어 한다. 대개는 그런 마음을 감추고 살지만, 힘을 가진 이들은 그 마음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모양이다. 낯선 것은 늘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는 버릇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 세우기는 대개 옛 질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열망에 들뜬 이들은 일쑤 ‘우리’ 외부에 ‘그들’을 상정한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해 있고, 부정적이고 추한 것은 다 ‘그들’에게 속해 있다고 믿는다. 이런 가름과 배제의 논리는 폭력과 등을 맞대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는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가름의 논리만이 횡행할 때 생명의 따뜻함은 파괴되고, 사람살이의 마당은 묵정밭으로 변하고 만다.

 

세월이 수상해서인지 정현종 선생의 시구가 자꾸 떠오른다. 시인은 꿈꾸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세상에서도 꿈을 버릴 수가 없다고 노래한다. 그의 꿈은 ‘이 세상의 떠돌이와 건달들, 이쁜 일탈자들과 이쁜 죄수들, 끌어안을 때는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사람, 발에 지평선을 감고 다니는 사람 등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울 수 있게 방이 많은 집 하나를 짓는 것이다. 그 집은 “무정부적인 감각들의 절묘한 균형으로/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그러한 곳”이다. 이 집에는 일사불란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시인은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모든 이들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집을 꿈꾼다. 이런 꿈은 그저 시인의 낭만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의욕적으로 출범한 정부가 질서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정부는 불법 시위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체포전담반을 구성했다. 엄혹했던 시절을 살아왔던 이들의 기억 속에 지금도 출몰하는 백골단의 부활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는 시위 때 마스크와 모자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이것은 다른 소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발상이 아닌가? 어느 시대든 집권자의 책무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질서는 배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포용을 통해서 수립되어야 한다.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질서는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 없다.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규칙>>에는 아빠스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몇 가지 들고 있다. 그는 부산을 떨거나 소심하지 말고, 과격하거나 고집스럽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명령에 있어서 용의주도하게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라를 운영해가는 이들에게도 요구되는 덕목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제 겨우 부등깃이 돋아난 새와 같다. 그 새가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오르기도 전에 새장에 갇혀버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혼자서 내딛는 백 걸음보다 함께 내딛는 한 걸음이 더 소중하다. 혼돈까지도 포용하는 품이 큰 정치를 기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얼굴에서 야망이 아니라 진실이 깃든 지도자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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