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기도로 품은 이슈32 2009년 04월 10일
작성자 김기석

주님,

한 주일만이라도,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심심하게, 한가하게, 느긋하게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살아있다는 게 그저 대견하고 고마워,

이웃들을 보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끊어질듯 팽팽하게 긴장된 마음 한껏 풀어놓고,

이웃들에게 던지던 가파른 눈길 거두어들이고,

마치 진귀한 꽃이라도 본 듯

낯모르는 이들에게도 환한 미소 건네고 싶습니다.

자기 앞에 나타난 낯선 존재를 바라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했던

첫 사람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꿈을 비웃습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의 고요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왠지 모를 분노가, 그리고 슬픔이 우리 가슴을 스치면,

‘인간이란 참 슬픈 존재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의식에 당도하는 순간

우리 눈에 든 5월의 초록빛 기쁨도,

담장에 피어난 장미의 그 황홀한 빛깔도,

그만 잿빛으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미얀마에 불어온 사이클론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지 불과 며칠도 지나기 전에,

중국의 쓰촨성을 뒤흔든 지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

그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문을 본 일이 있느냐?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 네 말 한 번 들어 보자”(욥38:17-18)

당신의 종 욥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유구무언일 따름입니다.

알 수 없기에 더욱 마음 아픕니다.

특히 공부를 하던 중 죽음의 사자와 맞닥뜨린

그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하기에는 믿음이 부족하고,

운명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현실입니다.

주님,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무엇입니까?

교만의 바벨탑 쌓는 일을 그만 두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의 범위 안에서 살라는 경고입니까?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지만,

세상 소음으로 익숙해진 우리 귀는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주님의 크고 따뜻한 품으로 안아 주십시오.

 

주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폭동에 가까운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 정책)로 인해

깊은 내상을 경험하고 있던 이들이,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에 사로잡혀

주변국 출신의 흑인 이민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부족한 일자리를 나누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이랍니다.

살아갈 방도가 막연한 이들의 마음은

이렇듯 절망의 심연 앞에서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현실 속에서 수행하기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하지만 비록 좁은 길이라 해도 바로 그것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가 택해야 할 길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 슬픔의 땅에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속살을 스치는 상처의 진액으로 모래를 진주로 바꾸는 진주조개처럼,

오랜 세월 그들이 받았던 아파르트헤이트의 아픔과 서러움을,

더 어려운 이웃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마음의 넉넉함으로 바꿀 힘과 능력을 주십시오.

 

주님,

이제 17대 국회의 회기가 만료되고 있습니다.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국회의원들 모두가 열심히 일했지만

국민들이 그들에게 내보인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합니다.

당리당략에 치우친 의원들의 행보를 보며,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거친 말과 헛된 말, 종작없이 허둥대는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은 묵정밭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18대 국회는

국민들의 시린 마음을 덮어주는 큰 이불이 되게 해주십시오.

쇠고기 협상, 한미 FTA, 각종 공기업의 민영화, 혁신도시 건설 등

해결해가야 할 과제들이 참 많습니다.

정치인들이 자기 계파의 이익이나, 단기적인 성과를 위해

우리 삶의 터전을 황폐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주님, 한 주일만이라도,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심심하게, 느긋하게, 한가롭게 보낼 수 있는 그 날을

선물로 우리에게 보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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