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봄의 사람을 기다린다 2008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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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사람을 기다린다 지금 내 앞에는 스틸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 제발리야 난민촌 주민들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희생된 두 살배기의 주검을 옮기고 있는 광경이다. 더러는 함성을 지르고 있고, 더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내게는 저들이 내지르는 함성보다 그들의 바닷속 같은 침묵에 담긴 눌함(訥喊)이 더 크게 들려온다. 두 살배기 어린 주검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들어올려져 있다. 그 주검의 무게는 태산보다 무겁다. 그 어린 주검은 “당신은 나의 이런 죽음에 책임이 없는가”를 묻고 있다. 그 사진을 유심히 들다보고 있자니 또 다른 영상이 스쳐 지나간다. 한 여인이 울음을 삼키며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일곱 구의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다. 굵은 베로 만든 천을 가져다가 바윗돌 위에 쳐놓고, 그 밑에 앉아서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로부터 하늘에서 그 주검 위로 가을 비가 쏟아질 때까지, 낮에는 공중의 새가 내려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 들짐승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여인의 입에서는 울음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부조리한 현실을 그냥 그렇게 견딜 뿐이다. 그 여인은 사울왕의 첩이었던 리스바이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리스바의 두 아들과 사울의 손자 다섯이다. 권력을 잃은 그들은 삼년이나 계속된 기근을 풀기 위한 희생양으로 바쳐진 것이다. 어디에도 그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 리스바의 몸짓은 하늘을 향한 물음표인 동시에 울음표이다. 세상 도처에 울음표로 서있는 사람들을 본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물론이고 케냐와 코소보, 그리고 파키스탄에서 테러와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나라를 잃고 떠돌고 있는 쿠르드족과 베두인족 사람들, 다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기억의 고통으로부터 좀처럼 해방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이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고통의 트라우마는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던 분의 고통과 합류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사랑받기를 소망한다. 모두가 다 평범한 행복을 꿈꾼다. 엄마의 새된 목소리에 쫓겨 졸린 눈 비비며 마지 못해 잠과 작별하는 아이들의 표정, 커피 한 잔의 향기, 거리의 분잡스러움, 일터에서의 적당한 스트레스, 평화로운 음악, 부드러운 말과 표정에 대한 그리움. 결국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솔로몬의 일생 동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왕상4:25) 이런 소박한 꿈조차 유린하는 모든 세력은 악이다. 제 아무리 견고하고 치밀한 논리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한다 해도. 폭력과 테러가 일상화된 세상은 새로운 사람을 기다린다. 힘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 힘을 가진 자들의 전횡에 동의하지 않는 검질긴 사람들 말이다. 지속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 영혼이 텅 비어 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인간임을 잊지 않도록 해주는 가슴 따뜻한 이웃들이다. 세상은 그렇게 야만적이지도 않고, 증오를 품어야만 건널 수 있는 고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 아닌 존재로 증언하는 이들, 봄이면 촛불처럼 노랗고 붉은 꽃을 피워 언젠가는 돌아올 쫓겨난 농부들의 길을 밝혀주는 저 팔레스타인의 선인장처럼 증오와 강퍅함에 사로잡힌 영혼에게 제 길을 가리키는 사람들 말이다. 차갑게 식어버린 가슴에 봄소식이 되어 다가가는 봄의 사람이 그립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깊은 울림이 되어 다가오는 아침이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멈추게 할 수 있다면,/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내가 만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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