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다른 북소리 2008년 0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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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북소리 수정처럼 맑은 강물 밑바닥에 여러 가지 생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강물은 모두 위를 조용히 흘렀다. 생물들은 강 바닥의 나뭇가지와 바위를 꼭 붙들고 있었다. 매달리는 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이었고,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배운 것이었기에 누구도 다른 삶의 방식은 생각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생물이 말했다. “나는 매달리는 것에 싫증이 났다.” 그는 어느 순간 숨을 깊이 들이 쉰 다음 바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강물은 그를 넘어뜨려 바위에 내던졌다. 그래도 생물이 매달리기를 거부하자 흐름은 그를 들어올려 자유롭게 해주었다. 생물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롭게 유영했다. 하류의 강바닥에 살고 있던 군생들은 자기들과 똑같은 모양의 생물이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기적을 보라. 우리와 똑같은 생물이지만 그는 날고 있다.” 군생들은 자유롭게 흐르고 있는 생물을 향해 외쳤다. “오셔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소서.” 그 생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남은 생물들은 여전히 바위에 매달린 채 구세주의 전설을 만들었다. 리차드 바크의 소설 <환상>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새삼스럽게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오늘 우리 사회가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인 김수영은 불온함이 젊음의 특색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곁에는 불온한 이들을 만나기 어렵다. 표정이 험하고 눈빛이 거친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인습적인 삶의 관행과 가치관을 거절하는 이가 많지 않다는 말이다. 사욕을 제거하고 천리와 하나 되기 위해 노력했던 선인들의 노력은 옛 사람의 허구가 된 것 같다. 매달리는 것이 생활방식이었던 강바닥의 생물들처럼 우리는 기존 질서가 부여한 가치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부박한 생존에 골몰한다. 욕망의 확대 재생산을 본질로 하는 자본의 논리가 자연의 순환을 차단하고, 시간의 축적인 문화를 파괴해도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욕망의 특색은 도취와 중독이다. 욕망에 중독된 영혼은 파괴되는 문화와 자연을 위해 울지 않는다. 불에 타 무너져내린 숭례문 앞에 국화꽃을 바치는 이들, 땅을 치며 우는 이들을 본다. 숭례문은 자신의 몸을 태워 메말랐던 이 땅의 울음을 깨우고 있는 것인가? 부재의 체험이야말로 존재의 존재됨을 가장 깊이 일깨운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정치인들의 작태야 늘 보던 풍경이니 할 말도 없다. 지금은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할 때다. 숭례문의 울음 속에서 우리는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요나의 외침을 듣는다. 개발의 그늘에서 소외된 이들의 피울음이야말로 사회 불안의 뿌리임을 깨닫는다. 요나의 외침에 귀를 기울인 것은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일어나 금식을 선포하고, 굶은 베 옷을 입은 채 참회하자, 임금도 걸치고 있던 옷을 벗고 잿더미에 앉아 회개했다. 변화는 순서는 분명하다. 백성이 먼저 깨어나야 지도자도 정신을 차린다. 헨리 데이비드 쏘로는 모두가 발을 맞추어 행진하는 대열에서 벗어나 딴 길로 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대는 세상의 북소리가 아닌 하늘의 북소리를 듣는 이들을 부르고 있다. 굳게 붙잡고 있던 욕망의 바위를 놓고 흐름을 타고 살아가는 ‘순천’(順天)의 사람들이야말로 새 시대의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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