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기도로 품는 이슈26 2008년 02월 12일
작성자
새 봄의 전령이 되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나님, 우수 절기가 눈앞이건만 겨울바람이 매섭습니다. 하지만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지구가 병들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계절의 리듬이야 어쩌겠습니까? 눈석임물이 계곡을 따라 우쭐대며 흘러내리고, 철 따라 내리시는 우로가 대지 위에 내리면 생명은 혼곤한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대지가 수런거리는 소리에 새들이 노래로 화답하면 돌연 세상은 생명의 노래로 충만할 것입니다. 해가 뜨는 곳에 가 본 적도 없고, 동풍이 불어오는 그 시발점에 가 본 적도 없지만, 굳은 땅에서 풀이 돋아나게 하시고, 인기척이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 설렘으로 봄의 노래를 기다리던 우리에게 들려온 것은 놀람과 슬픔과 분노의 탄식입니다. 600년 동안이나 서울과 함께 해온 숭례문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2008년 2월 10일은 오랫동안 우리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도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영욕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가던 민초들의 아픔을 말없이 보듬어 안던 큰 품이 그렇게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서울역을 지나는데,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다음 정류장은 숭례문, 숭례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숭례문의 부재가 아프게 실감되었습니다. 아뜩한 마음으로 불에 탄 잔해를 바라보는데, 당신의 종 예레미야의 애가가 들려왔습니다. "주께서 도성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작정하시고, 다림줄을 대시고, 성벽이 무너질 때까지 손을 떼지 않으셨다. 주께서 망대와 성벽들을 통곡하게 하시며 한꺼번에 허무시니, 성문들이 땅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애2:8-9a) 주님,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 낙산사 소실, 이천냉동창고 화재사건, 허베이 스피리트호의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데, 또 다른 충격이 우리의 의식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문화재가 소실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가 아픔과 상실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위험사회'라는 말이 조금도 낯설지 않습니다. 경제성장이라는 장밋빛 꿈에 도취해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에는 눈을 감고 안전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하는 우리들입니다. 경제성장이라는 바벨탑을 쌓으며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불에 타 버린 숭례문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고 말없이 묻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참담한 심정으로 숭례문을 지나는데 길가에 세워둔 LPG 운반 차량의 기사가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옆으로는 나무를 장식했던 꼬마전구 연결선이 피복이 벗겨진 채 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이 위험 사회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습니까? 주님, 우리에게 한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셨던 주님의 마음을 주십시오. 우리들 각자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주님, 경제 성장 신화의 매트릭스에 갇힌 이들의 마음은 가시와 엉겅퀴가 우거진 묵정밭과 같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뿐, 진심으로 서로를 돌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 무정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갑각류로 변해, 친밀한 소통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기운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 기운이 우리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생명과 평화의 일꾼으로 거듭나게 해주십시오. 세상은 여전히 겨울이어도 우리는 새 봄의 전령이 되어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