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초록 기도문 2008년 01월 22일
작성자
초록 기도문 하나님, 건물 사이를 휘돌아 오는 바람이 차갑습니다. 얼음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어린 시절이 그립습니다. 논두렁에 불을 놓아 젖은 옷과 양말을 말리던 친구들, 솔가지를 꺾어들고 불이 번지지 못하게 지키고, 불에 타 구멍난 양말을 보며 울상을 짓던 벗들의 그 발간 얼굴이 그립습니다. 삼동(三冬)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지만 한강은 더 이상 얼지 않습니다. 새끼줄로 감발을 치고 꽁꽁 언 강을 건너던 이들은 어느 세월의 뒤안길을 걷고 있습니까?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랫소리가 강토를 뒤흔들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뭔가에 쫓기며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가 그리워 벗을 찾아갔다가도 ‘바쁘다’는 말을 듣고 돌아서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전보다 살림살이의 형편은 나아졌지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밝지 않습니다. 하늘을 우러르며 별을 헤아리는 이를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미열에 들뜬 듯 풍요의 환상으로 인해 목이 마릅니다. 주님은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어주셨건만, 분주한 우리는 그것을 누릴 여유가 없습니다. 대지가 터뜨리는 경탄인 연둣빛 새싹이나 꽃망울을 보면서도 가슴이 설레지 않습니다. 바람 앞에서 설레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아닙니까? 이제는 잠시 멈추어 서고 싶습니다. 하지만 멈추는 순간 뒤쳐질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주님, 어찌해야 합니까?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일용할 양식 걱정에 목이 메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배고픔입니다. 못 먹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먹어서 문제입니다. 굳은 빵과 소박한 스프를 앞에 두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이의 간절함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캐테 콜비츠의 판화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이 떠오릅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음식을 찾기 위해 거리를 떠돌다가 배급소 앞에 이르러 접시를 받쳐들고 한 끼를 구걸하는 아이들의 퀭한 눈망울은 우리의 양심을 꿰뚫는 주님의 시선입니까? 주님,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주십시오. 그래서 굶주린 이들의 사정을 헤아리게 해주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이 참으로 잘 먹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주님, ‘보다 많이, 보다 편리하게’를 모토로 하는자본주의의 노래는 항해자들을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던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아닙니까? 세이렌이 살던 섬은 실상은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남태평양의 많은 섬들이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생물종들은 속절없이 멸종의 길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사막이 늘어나면서 호수에 의존해 살던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내몽골과 고비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는 기상 이변은 초록별 지구가 중병에 걸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돈을 ‘맘몬’이라 부르셨던 주님,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의 정원사로 부름받은 사람이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굴복한 이후 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분쟁과 테러와 전쟁은 밑바닥에는 소유와 지배에 대한 저열한 욕망이 놓여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서로 먹여주고 돌봐주고 설 땅이 되어주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죄악이 깊어감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던 주님, 주님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여전히 반역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제는 돌이키게 해주십시오. 시간은 불가역적이지만, 마음은 변화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욕망의 넓은 길에서 벗어나 절제의 좁은 길을 택할 용기를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주님, 자동차가 주는 편리함에 중독된 몸은 걷기를 싫어합니다. 몸이 게을러지자 마음도 덩달아 게을러졌습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진 것처럼 겅중거리며 살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그리도 허둥대며 사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제는 편리함의 종살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불편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날 수 없습니다. 차에게 내려 걸으면서, 정겨운 이웃과 들꽃과 바람, 그리고 햇살이 되어 다가오시는 주님과 만나게 해주십시오. 삶이 덧없다고 느낄 때마다 다섯 가지 색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가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이 입맛을 잃게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우리 영혼을 살찌워줄 말씀과 만나지 못해 우리 영혼은 파리합니다. 이제는 많은 것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아는 만큼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남들 만큼 소유하고 즐기며 살려 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주어진 것들을 한껏 누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주님, 입춘을 향해 가고 있는 오늘 문득 우리가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는 것도, 짝을 찾는 새들의 지저귐을 듣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주님, 시화호에서, 새만금에서, 태안에서 속절없이 죽어간 뭇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 초록별 지구를 되살리는 데 필요한 일꾼을 찾으시는 주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를 생명 살림의 일꾼으로 삼아주십시오. 아멘.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