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누가 사람인가? 2008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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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람인가? 며칠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귀여운 복면 강도를 만났다. 검은 마스크에 검은 모자까지 깊이 눌러 쓴 그는 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손가락 총을 겨누며 말했다. “손 드세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응?” 하고 되묻자 그는 다시 한번 “손 드세요” 하고 말했다. 장난에 응해줄 생각으로 손을 들자 그는 “나 강도 아닌데”라며 눈으로 웃었다. 손을 내려도 되냐고 묻자 맘대로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왜 그런 장난을 했을까? 어쩌면 자기 복장이 다른 이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기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런 표현 수단을 택한 것 같다. 정신지체인으로 보이는 그는 사무실에 휴지를 팔러 가던 길이었다. 왠지 가슴이 훈훈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피천득 선생의 시 <꽃씨와 도둑>이었다. “마당에 꽃이/많이 피었구나//방에는/책들만 있구나//가을에 와서/꽃씨나 가져 가야지” 담장을 넘던 도둑은 마당가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들에 눈길을 준다. 참 마음이 한가한 도둑이다. 슬며시 방을 들여다보지만 있는 거라곤 온통 책뿐이다. 공친 날이다. 그런데 그다지 속이 상한 것 같지는 않다.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 시가 독자들에게 마련해준 여백이 참으로 넉넉하지 않은가. 바쁜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너’의 자리이다. ‘너’의 자리에 나를 세워보지 않고는 이해도 소통도 불가능하다. 방법은 서툴렀지만 그 귀여운 강도는 자기 앞에 서있는 타인이 느낄 불안을 헤아리고 있었다. 마음이 훈훈해진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깥은 여전히 겨울이다. 무정한 세상이다. 태안군 의향리의 어민 이영권 씨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여러 해 정성들여 가꿔온 굴양식장이 유출된 기름으로 말미암아 폐허로 변하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지자 죽음의 심연으로 뛰어들고 만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삼성중공업이나 현대오일뱅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어떤 사죄의 몸짓도 보이질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일그러진 자본의 모습을 본다. 자본은 세상을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볼 뿐, 한 사람 한 사람이 겪는 아픔과 절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이란 말은 형용모순에 불과한 것인가? 근대화 이후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 가운데 하나가 배려이다. 자본에 의해 확대재생산되는 욕망의 굴레를 돌리느라 우리 마음은 묵정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사회적 유대가 붕괴되면서 파시스트적인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주변화되고 있다. 우승열패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패자의 자리는 없다. 유대인들은 신을 “많은 영혼과 그들의 결함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결함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고백이 매우 신선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누가 사람인가? 홀로 자족한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또 도울 줄 아는 사람이다. 더불어 있음의 바탕은 배려이다. 시절은 바야흐로 우리 정치․경제․문화 속에 배려의 숨결을 불어넣을 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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