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날실을 가지런히 할 때 2007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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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실을 가지런히 할 때 도심의 광장과 건물마다 빛의 계절을 상징하는 불빛이 화려하다. 인공의 불빛이 만들어낸 장관을 보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환하다. 그런데 저 가뭇하고 아득한 하늘을 응시하는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고 노래하던 시인은 지금 어느 별빛 아래를 걷고 있을까. 인공의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도심에서는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별빛을 보고 구유 앞에 이르렀던 현자들의 이야기는 과거지사에 불과한 것인가?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시간은 늘 중심을 향하여 기우뚱하게 흘러간다. 때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그 중심을 붙드는 것이 지혜이다. 마침내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승리한 이들의 얼굴에는 희열이 넘치고, 패배한 이들의 얼굴에는 자괴감이 감돈다. 하지만 지금은 너나없이 때의 징조를 가늠하기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할 때다. 이번 대통령선거의 이슈는 경제 살리기였다. 서민 경제의 주름살을 펴달라는 대중적인 욕구가 표 쏠림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국제질서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재편되면서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그 결과 청년 실업, 비정규직 양산, 실직자 증가라는 병리현상을 낳았다. 꿈조차 저당잡힐 수밖에 없는 이들의 욕구를 저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배타성을 본질로 하는 욕망은 늘 충돌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지도자들에게 그 다양한 욕망들을 조정하는 지혜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자는 차기 정부를 실용정부라고 지칭하고 있다. ‘실용’이라는 기표가 ‘꿩 잡는 게 매’라는 사고를 가리킨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목적에 대한 사회적 합의나 윤리적 성찰을 거치지 않은 결정이 실용의 이름으로 시행될 때 그것은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되기 쉽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경제 환원론이라는 매트릭스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매트릭스를 부수려고 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경청되고 있는가? 세상에는 직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곡선이 있음을 알리면서 사회의 균질적인 리듬에 ‘엇박자’을 만드는 사람들이 머물 자리가 있는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연 파괴의 실상을 고발하고, 사회의 그늘진 곳에 유폐된 이들의 목소리가 되려는 이들이 존중받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삶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날실이 가지런해야 씨실로 천을 짤 수 있다. 역사는 변할 수 없는 것과 변하는 것이 만들어내는 무늬이다. 경제는 결코 삶의 날실일 수 없다.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승리에 도취하고, 역사와 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시대는 위기에 처한 시대이다. 대통령 당선자와 그의 참모들은 사람들의 분출하는 욕망의 주름을 펴주는 동시에 그 욕망을 재영토화하여 인간다운 삶의 길로 그들을 안내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명령이다. 이제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공을 들였던 종교인들은 행여라도 그를 통해 덕보려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초월의 빛을 통해 역사를 조망하면서 상처입은 이들을 위로하고, 오만해진 권력을 고발했던 예언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서로가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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