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정직한 신앙을 깨우는 죽비소리 2007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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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신앙을 일깨우는 죽비소리 강일상 목사의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에 대한 논평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기적도, 그분이 베푸신 수많은 기적, 가령 벙어리의 혀를 풀어주시고, 미친 자의 정신을 돌려주신 등의 기적이 아닙니다. 왜 그런 기적이 아닌가 하면, 벙어리의 혀를 풀면 고자질하기를 좋아하는, 그래서 배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생길 뿐이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면 발 빠른 자, 그래서 백성을 학대하는 병정만 생길 뿐이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면 호기심이 많은 자, 그래서 첩자 노릇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 생길 뿐이요, 죽은 자를 되살리면 죄인, 그래서 남의 원수되는 자가 늘어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이여, 그런 기적은 잊어버리시오. 무슨 까닭이냐 하면, 그런 기적은 수혜자를 회심(回心)하게 한 것은 좋으나 구경꾼들에게는, 하느님을 믿는 대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효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보리슬라프 페키치, <<기적의 시간>> 상권, 24쪽 1. 강일상 목사님의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를 읽으며 내내 내 귓전을 맴돈 소리는 ‘학인의 기개가 매섭다’는 말이었다. 성서의 광맥을 철저히 궁구하는 그의 태도는 격물치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이십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재야신학자가 많아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아카데미 소사이어티의 틀 속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치열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도발적으로 글을 써내는 이들이 늘어날 때 신학도 교회도 발전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재야신학자로서의 꿈은 점점 희미해지고, 어느덧 제도권 속에 안주하는 목회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 현장에 서 있으면서도 매섭게 정진하고 계신 강 목사님의 존재는 장군죽비처럼 내 마음을 후려치고 있다. ‘述而不作’이라는 주자학적 엄숙주의가 학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18세기에 연암 박지원은 글쓰기의 지평을 한껏 열어젖혔다. 그의 글에 담길 수 없는 사물이나 현실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개혁군주라는 정조조차 깨뜨리지 못한 지배질서의 헤게모니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상상력은 늘 전복적이다. 그러나 전복적인 상상력도 허황하면 안 된다. 강 목사님의 글쓰기는 매우 전복적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전복적 상상력이 성서 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독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 신학의 안테나를 자처하면서 짐짓 신학적 상상력의 한계를 설정해주려할 뿐, 기존의 해석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듯한 강단 신학자들의 어정쩡한 태도에 대해서 그가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는 해석의 모험이라는 진경을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츠베탕 토도로프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석에는 맞고 틀리고가 없다. 오로지 풍부한 해석이냐 빈곤한 해석이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해석이냐 불모의 해석이냐, 새로운 지적 해석을 주는 해석이냐 단조롭고 지루한 해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저자의 구도자적 시각이다. 저자 텍스트에 대한 분석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바른 독해를 통한 삶의 변화인 것 같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이들이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소양이지만, 신학자들의 글이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저자는 성경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독자들에게 매우 상세하게 보여준다. 걸림돌이 될 만한 대목을 만나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다. 철저히 묻고, 철저히 파고든다. 마치 어두운 땅 속에서 물기를 찾는 뿌리처럼, 저자는 느리지만 끈질기게 메시지를 찾아간다. 독자들은 그런 과정을 따라가면서 성경의 진미를 조금씩 맛보게 된다. 우리 의식 속을 부유하고는 있지만 실체를 잡기 어렵던 말들이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되어 우리 앞에 놓인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곧 성령’이라는 말이 그 예이다. 저자는 치밀한 성서의 원어 분석을 통해 문장의 통사(syntax) 구조를 새롭게 밝히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형식을 제대로 밝혀내면 의미도 제대로 밝혀낼 수 있다”는 수사비평의 대전제가 이 책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듯하다. 겹겹으로 이루어진 텍스트의 층들을 밝혀내고, 그것이 출현하도록 한 원경험의 속살을 드러내고, 또 그 경험들이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 자체가 ‘메시지’를 찾는 작업이다. 텍스트의 통사 구조 분석은 본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의 지평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단편적인 예이긴 하지만 과거형으로 진행되던 이야기에 종종 사용되는 ‘현재형’ 동사의 활용은 독자들을 이야기 속에 끌어들이려는 마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저자는 밝혀내고 있다. 접속사 ‘카이’(그리고)가 상황 변화의 추이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문장의 역동적 성격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비해 ‘유뒤스’(곧)는 어떤 상황의 변화 속에서 ‘중간 과정을 생략할 때’ 흔히 사용된다는 사실만 알아도 성서를 보는 눈이 조금은 더 밝아질 것이다. 3. 이 책에서 저자는 한 인간의 영웅적인 삶을 기술하는 아리탈로지(aretalogy)의 표현양식이 예수님의 삶을 기술하는 복음서의 표현양식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런 기술 방식은 “역사적 인물을 ‘신화적인 원형’을 통해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를 모방하게 하고, 그 모방을 통하여 그 신화에 참여하는 개인의 삶을 의미 있는 삶으로 ‘재형성’”(15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예수는 교회적으로는 ‘집단 이상의 모델’이고 신앙인 개개인에게는 ‘이상적 자아의 원형’이다. 대속신앙의 관점에서 조금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 이런 발언은 매우 도발적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점에서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믿음이란 예수 따름이고, 예수 닮음이기에 궁극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자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믿음은 공허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복음서는 신화적 이야기틀을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이 구전 전승에 가장 적합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것은 신화화된 역사이다. 이렇게 말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나오는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등장하는 기적 이야기는 사실인가, 아닌가?” 저자는 기적 이야기 자체가 사실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렇다고 하여 사실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이야기 배후에 숨겨져 있을 뿐이다. 마가는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가르침의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마가의 기적 이야기야말로 그 가르침의 내용을 구상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기적 이야기는 가르침의 형상화라는 것이다. 기적의 대상이 늘 한 사람이라는 것이 이런 유추의 근거인데, 마가는 이른바 부분을 통해 전체를 나타내거나 전체를 통해 부분을 나타내는 제유법(提喩法, synecdoche)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별적인 이적 사건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설교인 셈이다. 그것이 설교이기에 지금도 여전히 생동하는 메시지로 우리의 잠든 영혼을 깨울 수 있다. 기적 이야기는 지금 해석을 통해 재현되기를 바라며 우리 앞에 있다. 해석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경험과 표상 사이의 틈에 고인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저자는 그런 능력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를테면 마을과 회당은 관습과 통념이 지배하는 억압의 공간이며, 배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귀신들린 사람, 나병환자, 중풍병자, 귀먹은 벙어리 등은 모두 그런 억압의 희생자들이다. 예수가 회당을 벗어나 시몬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나, 병자를 데리고 마을을 벗어나는 것은 그들에서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시몬의 집은 회당으로 대표되는 유대교에 대비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표상이다.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포용의 논리이다. 마커스 보그의 용어로 말하자면 회당과 마을은 ‘거룩의 정치학’의 보루이고, 시몬의 집은 ‘자비의 정치학’의 근거이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기적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믿음’(롬3:22), 혹은 ‘하나님의 믿음’(막11:22)이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이런 표현은 낯설다. 서구 신학의 관념 체계 속에서 인간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자일 뿐, 하나님의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마가에게 “믿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앎으로서 나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215)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말하신 대로 되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믿음을 갖는다’는 말은 인간이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충만한 인간,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적 인간, 신적 생명을 나눈 존재로서 회복되어 ‘만물의 주체’로 선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4.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분석을 통해 도달한 지점에서 바라본 한국교회의 현실은 참담하다. ‘만물의 주체’로 서기는커녕, 의존의 습성만 몸에 익힌 채 내적인 변화의 여정을 시작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학인의 섬세함이 돋보이던 저자의 음성은 이 지점에서 예언자의 사자후로 변한다. 성찰하지 않는 교회, ‘교회성장’을 추구하면서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욕망을 부추기는 교회는 더러운 영들과 야합하고 있다는 것이다.(58) 한국교회가 위선과 가식에 대한 질타로서의 꾸짖음을 잃는 순간 그 생명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치열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대속신앙은 ‘하이타이 신앙’(120)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을 향한 짠한 마음을 내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는 더 이상 드러나게 도시로 들어갈 수 없어서 바깥 광야에 계셨다.(막1:45) 그런데 “이 ‘더 이상’이 바로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고, 그 ‘바깥 광야’가 지금 우리의 예수님이 계신 자리”(123쪽)인지도 모른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부정직한 신앙’과 ‘솔직한 불신앙’ 사이에서 사람들이 부정직한 신앙에 투항해버렸기 때문이다. 묻고, 의심하고, 우회하고, 넘어지면서 새로운 해석의 모험에 나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석의 모험이 사라지는 순간 신앙은 관습이 되고, 관습이 된 신앙은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환상 위에 세우는 집이기 때문이다. 16세기의 영성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네가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십자가의 성요한, <<가르멜의 산길>> 중에서) ‘어둔 밤’을 거치지 않은 신앙은 유약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신앙, 통념에 의존하는 신앙이 한국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5.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은 내게 많은 점에서 의미론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의미는 사실에서 유래하지만 사실을 넘어선다는 것도 일깨워줬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역사의 신화화로서의 기적 이야기는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일관된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신체적인 기적 이야기 속에는 사회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구성은 양방향성을 갖는 것이 아닐까? 구체적인 몸의 경험이 사회적 의미를 함축하는 이야기로, 가르침의 형상화로서의 몸 이야기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기적 이야기가 오직 가르침의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예수와 만난 사람들의 총체적인 삶의 변화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의 연민이 육체라는 매개를 통해 전달되었기에 신산스런 삶에 짓눌렸던 이들이 몸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아픔, 배고픔, 죽음, 죄책이라는 생의 한계상황을 어루만지는 예수의 손길은 따습기 이를 데 없다. 그 손길조차 의미론적으로 환원되어 버려도 좋은 것일까? 우문에 대한 현답을 듣고 싶다. 과잉 해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더러 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이야기에서 저자는 서구 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원격치유’의 비밀은 “어미가 달라졌다면, 그 자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으로 새긴다. 이것은 그 여인이 오만한 자부심과 허영심에 가득찼던 사람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해석인데,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적어 보인다. 벳새다의 맹인 치유 이야기에서 예수의 침뱉음을 꾸짖음의 형상화로 보는 것(462)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사건이 제자들의 무지와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이에 위치했다는 것이 이런 유추의 근거인데,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다. 같은 이야기에서 ‘나무처럼 걸어다니는 사람을 본다’는 맹인의 대답으로부터 그가 예수를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뛰어난 사람’으로 유추해내는 대목도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물론 의미의 불변성을 전제로 하지 않음을 알지만, 행여라도 저자가 텍스트에 담긴 모든 것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본문의 편집 구조에 대한 정치한 분석, 그것을 바탕으로 한 해석상의 과제 제시, 그리고 본문 해석으로 이어지는 글의 구조는 마치 유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때로는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이 독서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본문의 중층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할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의욕이 오히려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다소 염려가 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6. 목회 현장의 분주함을 핑계로 공부를 게을리하는 내게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는 묵직한 죽비가 되어 정수리를 내리쳤다. 저자가 시도한 본문에 대한 사역(私譯)은 거끌거끌하다. 미숙하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시제와 단‧복수 그리고 단어 속에 함축된 숨은 의미까지 제공해주고 있어 원전을 해독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성서의 숨은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소중한 판을 열어주고 있다는 말이다. 번역은 반역이란 말이 있듯이 매끄러운 번역은 다양하게 열린 텍스트를 하나의 해석 가능성 속에 가둬버리기 쉽다. 저자의 성서해석은 늘 오늘의 현실에 맞닿아 있다. 성서가 전하고 있는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역시 유의미하게 다가와야 한다. 나는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한 이야기가 세계화 담론이나 신자유주의 체제를 읽는 지도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움으로 깨달았다. 바다 위를 걷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이 오늘의 민족주의 담론이나 인종주의에 대한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먹이라’고만 설교할 게 아니라 ‘먹이고 싶어지는 마음’을 일깨우고, 그저 ‘주라’고만 외칠 게 아니라 ‘줄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설교여야 한다(341)는 말씀 앞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는 텍스트에 대한 바르고 엄정한 이해가 어떻게 체제전복적일 수 있는지, 불의와 억압에 반대하는 것이 왜 신앙적인 행위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억압자들이 금서를 지정할 때, 정작 그들이 금지해야 했던 것은 성경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불의와 억압과 인종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성경보다 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책은 없다. 강 목사님의 글은 이 말이 허장성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다른 책을 기다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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