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희망은 허황하지 않다 2007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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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허황하지 않다 입동과 소설이 지나면서 날씨가 차가와졌다. 졸가리만 남은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쓸쓸하다. 방글라데시에 불어닥친 사이클론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재산 피해도 엄청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초겨울 추위에 노숙인들 몇이 동사했다는 음울한 소식도 들려온다. 하지만 그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찰 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고르지 못한 세상에서 늘상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인가? 그 사건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우리의 의식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한 채 곧 잊혀지고 말 것이다.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대선이라는 사이클론에 휘말리면서, 우리 발걸음은 더 큰 진폭으로 회똑거리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은 유력한 대선 주자가 과연 비비케이의 실소유자인가 아닌가, 어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것인가에 온통 쏠려 있다. 경제 회생의 꿈은 너무도 간절해서 도덕과 진실까지도 숨을 죽이게 하고 있는 형편이다. 비정규직 문제, 청년 실업 문제,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하지만 그늘 속에 방치된 채 동사하는 이들의 외로움, 그들의 삶을 내적으로 갉아먹었던 절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방랑에 지친 나그네의 마지막 안식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면 정치는 무엇이고 조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정치에 기대를 걸고, 기업에 기대를 건다. 그러나 일거에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정치인은 없다. 아무리 드레질을 해보아도 우리 얼굴을 환하게 해 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삼성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골몰하는 기업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고통에 대자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희망은 본시 희박한 것이지만 허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봄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여리게 시작된다.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부인 그라사 마셸은 유명한 평화운동가이다. 그는 에이즈 퇴치운동,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을 돌보는 운동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가 했던 일 가운데 주목할만한 것은 문맹퇴치운동이었다. 그의 활동 덕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문맹율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비결을 묻자 그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 하나를 가르치면 된다”고 대답했다 한다. 싱거운가? 그렇지 않다. 희망은 그렇게 시작된다. 평생을 콜카타의 빈민과 함께 살았던 마더 테레사의 증언도 다르지 않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그게 시작이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슬픔이나 동정심 같은 감정을 관장하는 변연계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눈 뜬 사람들이 있다. 사회 부조적 관계가 무너진 세상이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성탄절기가 다가오면서 도심은 빛의 축제로 돌입할 태세다. 하지만 진짜 빛은 이 강고한 자본주의 체제에 인정과 사랑과 돌봄의 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비쳐온다. 그들이 있어 희망은 허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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