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의 창을 열다 2007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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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창을 열다 올 겨울 들어 서울이 처음으로 영하로 내려간 날 아침, 트렌치 코트를 꺼내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차가운 거리로 나섰습니다. 바람이 위세를 자랑하자 은행나무잎이 사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게 늦가을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햇살은 눈부셨고, 저는 서늘함을 즐기며 걸었습니다. 이제부터 내복 검사를 해야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더군요. 몇 해 전부터 겨울이면 내복 입기 캠페인을 해보지만 젊은이들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도무지 동참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겨울은 좀 춥게 지내고, 여름은 좀 덥게 지내자고 입이 닳도록 말하지만 사람들은 불편함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즐거운 불편’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말해온 덕에 저는 불편한 목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환경 문제를 앞장서서 이야기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통해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나 온산 공단 문제를 접하면서부터입니다. 하지만 그게 생태학적인 개종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인생을 계기적 실존이라 하던가요? 재직하고 있던 학교를 떠나 백수생활을 하고 있던 1990년 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우리나라에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하는 제1회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 대회>가 열렸고, 그 대회에 참여하면서 저는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2차 초안문서인 “홍수와 무지개 사이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창조질서의 온전함이 대부분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요인들에 의하여 심대한 위협을 받고 있다. 이 지구상의 생명은 조화롭고도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들의 상호작용에 의존해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인 프로세스의 미묘한 균형이 붕괴하게 되면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현재의 역사적 시점에서 중요한 상황으로 접어들어가고 있다. 인간은 창조질서에 대하여 광대한 실험들을 벌여 왔는데 이러한 실험의 궁극적인 결과는 대단히 파국적인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치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그런 조화 속에서 지탱되던 생태계가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멸절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소극적으로나마 반생명적인 삶에서 벗어나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생명운동으로 전환시킬 용기도 능력도 제게는 없었습니다. 안타까워하며 개인적 실천에 힘쓰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일깨우는 데 주력했을 따름입니다. 반응은 미미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생태계의 파괴는 가속화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가능성이었던 것이 이제는 현실이 되어 우리 눈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생명 멸절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풍요의 잔치에 넋이 빠진 사람들은 현실에 눈을 돌리려 하질 않습니다. 며칠 전 방글라데시를 휩쓴 사이클론으로 말미암아 사망자가 최소 3,000명에서 최대 10,000명에 이른다는 보도를 보면서 목이 말랐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주전 8세기의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은 자가 거두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이 누린 자들이 심어놓은 재앙의 씨앗을 수확하는 것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입니다. 이런 불공평이 어디 있습니까? 많이 누리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이제 또렷한 음성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라는 구호 아래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이 시대의 노래는 <<오뒷세우스>>에 나오는 사이렌의 노래처럼 모두를 죽음으로 이끌 뿐입니다. 2억 년 동안 지구가 만들어온 천연자원을 지난 200년 동안 거의 탕진하였으니 문명의 식욕을 대단하다고 해야 할는지요? 여신이 아끼는 나무를 도끼로 찍어 넘긴 죄로 배고픔의 형벌을 받았던 신화 속의 에릭직톤이 다름 아닌 근대인의 초상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음식을 사다가 급기야는 제 살을 베어먹고 죽었던 에릭직톤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요?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석탄 등 천연자원으로 지탱되던 문명은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습니다. 석유 생산이 정점을 지났다는 보도도 들려오고, 이산화탄소의 증가로 인한 기후 변화로 예상치 않았던 질병에 대한 보도도 끊이질 않습니다. 생물종들이 빠른 속도로 죽어가면서 지구의 보호막이라 할 수 있는 생물권(biosphere)에 구멍이 뚫리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교회 지붕 위에 햇빛 발전소를 올렸습니다. 몇 해 전 부암동에 있던 에너지 대안센터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곳을 다녀온 후 햇빛 발전소를 세우리라는 고운 꿈 하나가 제 가슴에 잉태되었습니다. 그 꿈을 우리 교인들 공동의 꿈으로 전화시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화석 연료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고, 뭔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핵 융합 반응에 의해 초당 약 900억 조 칼로리의 에너지를 방출한답니다. 그것이 대기권 밖에 도달하면 초당 약 42조 칼로리로 줄어들고, 그 그 70% 정도인 30조 칼로리가 지구의 표면에 안착하게 됩니다. 태양은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에너지의 15,000배나 되는 양을 매일 지구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것도 무료로 말입니다. 햇빛에너지는 마음만 열면 누구라도 받을 수 있는 값진 선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성경 말씀을 요즘 저는 또 다른 의미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지붕에 올린 햇빛 발전소가 생산하는 전력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3킬로와트 용량이니까 기껏해야 한 가정이 필요로 하는 전기를 충당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햇빛 발전소를 세운 것은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이었습니다. 욕망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하늘 빛을 맞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창문이라 할까요? 꽤 많은 이들이 햇빛 발전소를 견학하러 옵니다. 와서는 “애개, 겨우 이거예요?” 하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태양 전지판과 변환장치로 구성된 그 단출한 시설을 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단출합니다. 그렇기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행정절차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고맙게도 <시민 발전>에서 다 대행해주었기에 우리는 번거로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햇빛 발전소를 세운다는 것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문명을 전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지금 제게는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당과 사찰의 지붕마다 햇빛 발전소가 들어서는 꿈입니다. 한 사람이 건너면 모두가 건널 수 있다 했습니다. 종교 시설의 지붕마다 하늘을 향한 창이 열리게 될 때 피조세계의 신음소리는 조금씩 잦아들 겁니다. 요즘은 햇살 좋은 날이면 마당가로 달려나가 전력발전현황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앞에 서서 혼자 흐뭇해 합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공간에 세워진 햇빛발전소는 나무 200그루가 처리하는 만큼의 이산화탄소를 절감한다고 합니다. 그 좁은 공간에 나무 200그루를 심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우리 교회 지붕에 세운 햇빛발전소는 새로운 삶을 향한 하나의 이정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하늘을 향해 건네는 수인사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는 생태학적인 발자국을 덜 남기는 삶을 향한 소박하지만 끈질긴 행군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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