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선물이 된 사람 2007년 11월 06일
작성자
선물이 된 사람 사람은 ‘생(生)’인 동시에 ‘명(命)’이다. 풀이 자라듯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살아감이 ‘생’이라면, 그 의미를 묻고 그 의미에 따라 살아감이 ‘명’이다. ‘명命’이라는 글자는 본래 예관을 머리에 쓴 사람이 무릎을 꿇고 조용히 신의 계시를 받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이 ‘명’을 자각함으로써 깨닫게 된다. 자기 생명을 스스로 택하여 태어난 사람은 없다. 삶의 시간도 자리도 다만 주어졌을 뿐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 한다. 고독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벌거숭이로 세상에 던져진 영화 속의 <터미네이터>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지만, 사람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을 모른다. 인생은 물음표이다. 삶은 고단하다. 그래도 목숨 붙어 있는 한 살아야 한다. 시인 김승희의 노래가 이런 삶의 고단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병든 물음표, (<신의 연습장 위에> 부분) 병든 물음표일망정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암중모색하는 과정이 인생이다. 갈림길에 설 때마다 의지를 곧추 세워 한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걷는다. 모호하고 불확실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을 기획한다. 그렇기에 사람을 사로잡는 기본 정조는 불안이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 사람 가인이 살게 된 땅은 에덴의 동쪽 ‘놋’ 땅이었다. ‘놋’의 뜻은 ‘유리하다, 방황하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가인의 후예인 우리가 사는 곳 어디나 다 ‘놋’ 땅임을. 그곳은 늘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을 자각할 때 숙취처럼 찾아오는 것이 멀미이다. 시간 속의 멀미, 이게 예토에 살고 있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모이라(moira)이다. 이렇게 말하니 암담하다. 멀미를 잊으려면 환상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을 탐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환상에서 깨어나면 공허감은 더욱 깊어간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럽고, 부끄러워 또 술을 마시는 <<어린왕자>>의 술주정뱅이처럼 우리는 몰각의 악순환에 빠져든다. 환상을 거부하며 눈을 부릅뜬 채 길을 찾는 이들도 가끔, 아니 자주, 백척간두에 매달린 듯 어지럼증을 느낀다. 영혼의 어둔 밤이다. 겨울이다. 세상이 가장 어두운 동지 무렵, 엄부렁한 마음 한 켠이 시려질 때, 허무의 그림자가 설핏 설핏 우리 삶에 드리울 때, 우리는 한 소식을 듣는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어둠에 질린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게 마련이다. 더욱이 그 빛은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했다. 길을 찾는 이들은 그와 만나야 한다. 별빛을 따라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이르렀던 동방박사들은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 참을 찾는 이들의 표상이 아닌가. 예수, 그는 우리 삶의 자리에 현존(present)하면서 길을 가리키고, 길을 함께 걷고, 스스로 길이 됨으로써,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선물(present)이 되었다. 예수는 언제나 질문인 동시에 대답이다. 나는 묻고 그는 대답한다. 이때 나는 콘텍스트이고 그는 텍스트이다. 또한 그가 묻고 내가 대답한다. 이를 통해 신앙고백이 생활이 된다. 물음과 대답의 되먹임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삶은 더 이상 적막강산이 아니다. 향방없는 날뜀도 아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걷는 이의 발걸음은 흔들림은 있을지언정 방향을 잃는 일은 없다. 예수를 길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마음에 든든한 지주를 세우는 일이다. 이런 삶에 눈을 뜬 것일까? 시인 구상은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은총에 눈이 떠서/세상 만물을 바라본다.”고 노래했다. 참 좋다. 이제 더 이상 세상 만물이 무목적 속에서 부유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지척도 분간되지 않던 無明 속 어둠의 허깨비들은 스러지고 쳇바퀴 돌 듯 되풀이하던 목숨의 시간들이 신비의 샘으로 흐른다. (구상, <은총에 눈이 떠서> 부분) 되풀이하던 삶의 시간이 신비의 샘으로 흐른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둠은 걷혔다. 겨울도 지나갔다. 예수를 선물로 받아들인 이들은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고 있다. 세상 길은 여전히 팍팍하지만, 그 길을 흐르듯 걷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다. 눈이 열린 이들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 법이니 말이다. 후암동에는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가브리엘의 집>이 있다. 그곳이야말로 땅끝이다. 그들은 모두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을 닮았다. 모두 사랑에 목이 말라 목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가끔 가브리엘의 집 식구들은 먼 나들이를 한다. 거제도에도 가고, 부산도 가고, 화진포에도 간다. 그들의 나들이는 그야말로 행차다. 식구들 수만큼의 자원봉사자가 동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그리도 먼 나들이를 하는 것일까? “우리를 환영해주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래서 아무리 멀어도 오라는 데가 가까운 데지요.” 원장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설명해준다. 가슴이 멍해져 따라 웃지 못하는 이들에게 원장님은 한 마디를 더 보탠다. “우리는 목사님들을 기사로 모셔요. 하하하.” 그 목사님들 참 멋있다. 운전을 할 생각이 없는 나이지만 그때는 아주 잠깐 ‘나도 운전을 좀 배울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세계의 분쟁지역에 평화의 씨를 뿌리는 <개척자들> 사무실이 교회 옆으로 이사왔다. 예수를 길로 삼은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채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을 벗삼아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평화 복무’가 그들의 꿈이다. 얼바람맞은 사람처럼 겅중거리며 사는 이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해맑다. 잠시 눈을 감으면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하늘의 숨결을 불어넣던 이가 떠오르고, 그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보이고, 그들을 따르는 또 다른 제자들이 보인다. 예수를 선물로 받은 기쁨에 스스로를 세상의 선물로 바친 이들이다. 거리의 높은 건물들마다 오색등이 영롱하게 밝혀지고, 가로수마다 꼬마 전구들이 반짝이는 계절이 왔다. 루미나리에 축제도 열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을 꺼야 할 때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이 더욱 영롱한 것 같이, 어둠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라야 예수가 또렷하게 보인다. 예수를 통해 이웃들이 보인다. 보는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관성적인 삶을 계속할 수 없다. 병든 물음표일 때 우리는 무력했고, 말줄임표일 때 우리는 고독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은 이제 느낌표로 서서 그분의 손과 발이 되기를 소망한다. 가슴 시린 이를 덮어주려는 마음이 없다면, 허방다리를 짚은 것처럼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메마른 세상을 회똑거리며 걷다가 목이 탄 이들에게 시원한 샘물 한 잔 대접하지 않는다면, 주변화된 이들이 살 맛을 되찾도록 돕지 않는다면, 믿음은 헛것이다. 세상의 선물로 오신 예수, 그 예수를 따라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 이 계절은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른다.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는 피에르 신부의 말은 성탄 시기를 걷는 우리 모두의 길잡이가 될만하다. “세상의 모든 돈으로도 결코 인간을, 그것도 서로 사랑하는 인간을 만들 수는 없음을 누가 알지 못하랴. 서로 사랑하는 인간들만 있다면 모든 걸 만들 수 있다. 행복도, 진정한 평화도, 꼭 필요한 돈까지도.”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