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시간이 촉박하다 2007년 10월 26일
작성자
시간이 촉박하다 올해의 노벨 평화상은 <불편한 진실>이라는 책과 다큐멘터리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유엔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에게 돌아갔다. 노벨상 위원회는 그들을 선정한 이유를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그러한 변화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조치들의 기초를 다지는 데 노력한 공로를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환경 문제를 천착해온 개인과 단체에게 평화상이 돌아갔다는 것은 평화 문제와 지구 온난화로 상징되는 환경 문제가 더 이상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노벨상 위원회는 기후변화와 평화의 관련성에 대해 “기후변화는 대규모 난민과 자원에 대한 폭력적 경쟁을 유발해 궁극적으로 인류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내리고, 기후 변화로 인한 재해가 세계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꽃들의 개화시기가 불규칙해지고, 침엽수의 남방한계선이 북상하고 있고, 연근해에서는 한대성 어류인 명태가 사라진 자리를 아열대성 어족들이 채우고 있고, 황사 일수와 오존 경보 일수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황에 대한 인식은 비슷하다. 문제는 대처이다. 누구도 선뜻 그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직면한다면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자기가 딛고 서있는 가지를 톱으로 자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가 더 빨리 톱질할 수 있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어느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떨어졌다. 나무 위의 사람들은 그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톱질을 계속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더 많이, 더 편리하게’를 외치는 소비주의의 선동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같다.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이미 죽음에 매혹된 사람이다. 누가 참 사람인가? 생태학적 발자국을 가급적이면 적게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닐까? 몇 해 전 프란츠 알트의 <<생태주의자 예수>>라는 책을 읽다가 “생태계 위기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한 기독교는 예수의 핵심을 이미 저버린 셈”이라는 구절과 만났다. 종교의 본질이 생명을 온전케 하는 데 있을진대 이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하겠다. 환경과 생명을 기독교 윤리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그 길을 따르려는 교인들의 뜻을 모아 교회 지붕에 햇빛 발전소를 세웠다. 그리고 현재 생산되고 있는 전력량, 누적 전력량, 이산화탄소 절감량을 수치로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옆면에 “우리가 이곳에 청파 햇빛 발전소를 세우는 것은 창조질서의 보전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이제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마다 자신이 적임자라고 주장한다. 누가 적임자인가? “어떤 정치적 결정은 일곱 세대 뒤의 후손들이 보기에도 틀림이 없는 것이어야 올바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인디언의 오랜 지혜를 새김질해야 할 때이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