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지금은 촛불을 들 때 2007년 0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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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촛불을 들 때 미얀마에서 무장한 군과 경찰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사람들의 사진을 앞에 두고 마종기 시인의 시집을 꺼내어 <시인의 용도․1>을 읽는다. 시인은 분쟁으로 몸이 찢기고, 열 살이면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다가, 기근으로 검게 말라 쓰레기처럼 죽어가는 이들이 세상 도처에 있음을 떠올린다. 하루도 그치지 않는 총소리, 하루도 쉬지 않는 살인. 이게 세상의 현실이다. 그런데 시인은 묻고 있다.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어디 있습니까.” 남들의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고 함께 아파하지만, 그게 다 일 수 없음을 알기에 시인은 시인의 용도를 묻는 것이다. 어느 결에 나는 ‘시인’의 자리에 ‘목사’를, 또 그 자리에 ‘그리스도인’을 대입하고 있다. 80년대 초반의 어느 날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던 목요기도회가 떠오른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표정조차 잃어버린 남편을 어렵사리 면회하고 돌아온 한 여인이 단상에 섰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가슴 졸이며 남편을 찾아다니던 그 과정을 다 이야기했다.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과 치욕에 몸부림쳤을 남편을 떠올리며 여인은 눈물을 흘렸다. 어느 순간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제 눈물을 닦겠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그렇게도 이루려고 애썼던 민주화된 세상을 열기 위해 땀흘리겠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가슴 가득 밀려오는 분노와 고통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한 노인 목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하느님, 들으셨습니까, 이 신음소리를? 하느님, 당신도 우리처럼 마음이 아프십니까?” 질문은 이미 대답이었고 결단의 촉구였다. 그 기도에 동참하며 모두 한 마음이 되었다. 그때 하느님의 마음 아픔이라는 말이 내 가슴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단에서 미얀마에서 하느님은 지금 신음하고 계신다. 그 소리를 듣는 이는 더 이상 비겁하고 안일한 침묵에 잠겨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슬픔에 공감할 때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라 ‘우리’가 된다. ‘우리’가 지금 피를 흘리고 있다. 폭력과 억압을 벗어버리려는 미얀마인들의 투쟁은 숭고하다.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든 신성을 드러내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고빗사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국제사회의 확고한 지지와 연대이다. 인간띠를 만들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을 막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이제 전 세계에 있는 양심적 세력이 손을 잡아 미얀마 군부로 하여금 광기어린 폭력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세상과 소통하기를 거부한 채 오만과 독선의 성채 속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기독교가 이 일에 앞장서면 좋겠다. 세상의 억압과 죽음의 세력을 향해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하고, 그보다 훨씬 취약한 생명을 향해 ‘예’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품이 되어 주기 위해 애쓸 때 기독교는 새로워질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꽃이 아무리 피어도 수정이 못 되면 열매를 못 맺듯이 전체의 뜻으로 수정이 못된 마음은 쓸레 마음”이라 했다. 하늘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은 이웃의 신음소리를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누군가의 신음소리를 듣는 사람은 그 순간 인류의 대표자로 그 자리에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미얀마를 위해 촛불을 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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