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기도가 내게 찾아왔다 2007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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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내게 찾아왔다 --필립 얀시의 <<기도>> “동양의 어느 현자는 매일 기도를 할 때마다 자기로 하여금 흥미로운 시대에 살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자가 못 되는 우리는 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지라 흥미로운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알베르 카뮈가 ‘예술가와 그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웁살라 대학에서 행한 강연의 첫 문장이다. 거리를 두고 현실을 조망하고, 자기 나름의 소통 매체를 통해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예술가들에게 이 시대는 분명 ‘흥미로운 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비판적 거리 두기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시대는 어쩌면 ‘어질증의 시대’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보급, 여행의 자유화로 공간은 자꾸 납작해지고, 정보의 유통과 상품의 소비 주기가 짧아지면서 분절된 시간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숨이 가쁘다. 흥미롭지만 어지러운 세상에서 제 정신을 차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우리 국민의 눈길은 온통 아프가니스탄에 쏠려 있다. 탈레반에 의해 납치된 22명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제는 우리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루며 배우고 있다. 이 일이 주는 충격 때문인지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과 KTX 여승무원들의 외침은 짓눌린 외침(訥喊)이 되고 있고, 평화의 섬 제주도에 들어설 예정인 해군기지를 둘러싼 그 뜨거운 공방도 잦아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도를, 피랍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이들의 처연한 기도를 하나님은 과연 듣고 계실까? 듣고 계시다면 어떻게 응답하실까?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가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기도는 계속된다. 그것은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사람 속에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렁이 있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풍요로움과 명예로도 그 구렁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근원적 그리움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어쩌면 언표된 기도보다 더 깊은 기도는 자신의 유한함에 대한 절실한 자각인지도 모르겠다. 마하트마 간디는 “내 자신 기도 없이는 도저히 행복해지지 못할 것 같은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았을 때 기도가 내게 찾아왔다”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저마다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대체 기도란 무엇인가? 저명한 기독교 저술가 필립 얀시(Philip D. Yancey)는 이 물음을 던져놓고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기도에 대한 생각과 기도의 경험을 청취했고, 그들이 제기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얀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기쁨이 아니라 짐으로 여기고 있음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기도가 대단히,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꾸준히 주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자신을 정죄하며 늘 죄책감에 시달리는 형편이었다.”(17쪽) 그 원인은 다양하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일으킨 영적인 혼란, 회의론의 확산, 풍요로운 생활이 주는 영적 태만함, 분주함 등이 그것이다. 이런 방해를 뚫고 굳이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얀시는 친구인 팀 스태포드의 말을 인용해 대답을 시도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해서 기도하는 법이다. 주님을 찬양하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감사 기도를 드리면서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겸손히 인정하게 된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용기가 생겨서 상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스스로 돕는 훈련’이다.”(96-7) 이것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는 데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 그렇다면 기도는 수양이나 마인드 컨트롤과 무엇이 다른가? 기도하는 이유가 ‘유익’뿐이라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여기서 얀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기도는 나의 욕망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기도란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오는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임재에 반응하는 방식”(86쪽)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까닭은 흩어진 삶의 초점을 모으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분주하신 가운데도 늘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세상에서 아버지와 파트너십을 유지할 능력의 원천으로 여기셨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나의 기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기도는 거지의 징징거림도 아니요,/사랑의 고백도 아니다./장사꾼의/‘주시오, 그러면 나도 주겠소’ 하는 식의/하찮은 계산 따위는 더욱 아니다//나의 기도는/한 병사가 사령관에게 드리는 보고이다./‘이것이 오늘 제가 한 일입니다./이것이 제가 담당한 작전지역 안에서/전투 전체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벌인/전투 방법입니다. 이것들은 제가 발견한/장애들이고, 이것이 내일의 전투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 은총과 응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이런 태도는 불경해 보일 수 있다. 볕뉘만을 찾아다니는 얼굴 창백한 기독교인들은 이런 당찬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려는 그분의 뜻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 긍휼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피조물들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렇기에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파트너십이라면 사람은 마땅히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개진해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경건은 아니다. 때로는 ‘뜻이 이뤄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하지만 ‘뜻을 바꿔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기도는 “은혜가 작동할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열쇠”(179쪽)가 된다. 칼 바르트는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행위야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는 출발점”(209쪽)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세상의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전제되어야 한다. 세상은 싸움터이다. 폭력과 탄압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의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다. 냉소와 공허감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사회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 된다.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 한복판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질서를 세우려는 영적인 엑소더스일 수 있다. 기도(祈禱)는 기도(企圖)로 이어질 때 참다운 기도가 된다. 나는 요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신문에 ‘기도로 품는 이슈’라는 제목으로 기도문을 올리고 있다. 두 주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건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매우 유익한 경험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도 우리의 삶과 무관한 일이 없건만 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일에 게을렀다. 호주제 철폐에 대한 논쟁이든, 조기유학생들에 대한 문제이든, 학력을 위조하는 현실이든 그것을 기도 속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본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뜻에 조회하다보면, 세상에 나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시각과 에너지를 얻게 된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은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는가이다. 얀시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피조물을 무시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얀시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주여, 제 이웃을 돌봐주소서. 남편을 잃고 혼자 자식을 키우는 아이 엄마의 고단한 삶을 돌봐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치자. 갑자기 머릿속에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놀이공원에 갈 때 그 집 아이를 데려가야겠다고 얘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네’라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친구 내외의 삐걱거리는 결혼 생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잘 어울려 살도록 뭘 도와주고 있지? 신경 써주는 게 하나도 없잖아’라는 마음이 생긴다.”(222쪽) 이것도 기도의 응답인 것이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변화의 기미를 알아차리는 식별력이 요청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심이 은총일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었던 김교신 선생은 어느 해 세밑에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올렸다. “주님! 올 한해에도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들어주시지 않는 기도에 대한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 것이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무익하지 않은 것은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를 재건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277)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얀시는 이 책에서 기도자들이 흔히 경험하는 여러 가지 좌절들을 다룬다. 자기의 존재가 무가치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기도 중에 생기는 온갖 잡생각도 기도에 방해가 되고, 기도를 제대로 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기도 생활을 방해한다. 그런 방해를 뚫고 기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침묵에 익숙해져야 한다. 기도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바친 기도가 응답될 수도 있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 즉 기도로서 결과를 강제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422쪽).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조율하는 과정이니 말이다. 책의 후반부는 기도의 실제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다소 반복되는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내게는 관상 기도 중에 떠오르는 분심을 기도 속으로 끌어들이라는 권고가 새롭게 다가왔다. 분심이란 내 속에 있는 무질서한 애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상적 일치를 방해하는 그런 분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내적 자유가 커지고 또한 자신과의 화해도 가능하다. 필립 얀시의 <<기도>>는 기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으나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기도에 입문하기를 꺼리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기도 경험이 본문의 중간에 수록되어 있다. 그것은 본문의 맥락을 따라가며 읽는 데 다소 방해가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누구나 기도의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유익하다고 할 수 있겠다. 기도의 권능에 대한 가슴 뜨거운 증언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는 이들은 기도를 간청이 아닌 하나님의 동행으로 이해하는 얀시의 입장에 놀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기도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도 여전히 남는 질문은 극악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신음소리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가이다.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응답은 너무 더딘 듯 보인다. 이해할 수 없지만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기도가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시대에 살지 않아도 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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