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기독교인의 환경윤리 2007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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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신음소리가 높아가는 이 때, 환경세계를 보전(保全)하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기독교 신앙생활의 본질적인 내용입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초록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실감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시인은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생태계의 파괴를 보면서 “끙끙 앓는 하나님/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하고 탄식했습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고, 엘니뇨와 라니뇨 현상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생태적 리듬이 급격히 바뀌고 있고, 숲은 사막으로 바뀌고,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고,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해수면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다양성이야말로 생태계 건강의 척도라 할 수 있는데, 수많은 생물들이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유엔 산하의 기후 변화에 대한 정부간 위원회(IPCC)의 보고서는 앞으로 8년 이내에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생태주의 작가인 독일의 프란츠 알트는 <<생태주의자 예수>>라는 책에서 흥미롭지만 두려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주공간에서 우리의 별 지구는 다른 별 하나를 만난다. 그 별이 지구에게 묻는다. “너 잘 지내니?” 우리의 별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지가 못해. 나는 호모 사피엔스를 태우고 다니거든.” 그러자 그 낯선 별이 지구를 이렇게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까짓것. 신경쓰지 마. 금방 사라질 거야.”>노아 시대에 이미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던 주님께서 지금의 인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탄식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피조물의 신음소리가 높아가는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논의가 분분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행동의 유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를 손과 발이 되어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인간됨이라는 말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는 이것을 ‘정치적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 만물은 창조된 질서와 생태의 균형을 위해 각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그러한 질서와 정의의 보호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모든 생명이 다른 생명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질서를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생물들조차 “모두 한 분의 아버지, 똑같은 사랑의 하나님의 피조물들”(<새 창조> 설교제64번)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의 청지기론에서도 나타납니다. “청지기는 수중에 맡겨져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용해서는 안 되고 주인의 생각대로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는 주인의 뜻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을 아무것도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선한 청지기>, 설교51번) 우리에게 위임된 세상을 경외함으로 돌보고 가꾸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마땅한 책임일 것입니다. 생명이 속절없이 파괴되고 있는 세상은 생명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적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념을 함께 느낀다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데 우리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지금 피조세계의 신음소리 때문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고통받은 인류와 피조세계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지금 일어서야 합니다. 교회도 편리함과 안락함을 조금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성도들도 일상 속에서 기꺼이 불편함을 택하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영적인 삶에도 훈련이 필요한 것처럼 생태적 삶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생명의 기적이 나타나면 좋겠습니다. 전기불을 끈 후에야 달빛과 별빛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불편한 삶을 택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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