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일 2007년 0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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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일 스탠리 존스의 <<순례자의 노래>>,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07 계기적 실존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누군가의 자서전이나 평전에 손이 간다. 치열하게 살다간 이들의 삶의 족적을 따르는 동안 내 속에서 가뭇없이 사위어가던 생의 불꽃이 되살아나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혼들이 남긴 흔적은 분명 이정표가 되어 내 삶의 중심을 찾아가는 일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여정을 곁눈질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왜소함을 절감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실낙원 이후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든 시간은 ‘의미를 묻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그 말은 인간은 무의미와 혼돈의 가능성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기도 한다는 말이다. 시작과 끝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우리는 길을 찾고 있다. 우리가 원형적인 삶으로 거듭해서 회귀해야 하는 까닭은 거기서 공급받은 활력으로 앞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살라는 명령을 받아 태어난 모든 인간 존재는 본질상 순례자이다. 살라고 명령받은 모든 곳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순례자는 어느 한 곳에 잠시 머물기도 하지만 늘 떠남 속에서 자기 존재를 구현한다. 파우스트 박사가 아니라 해도 ‘오늘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타당하다. 흘러간 것은 강물만이 아니다. 두 번째로 강물에 들어서는 나도 이전의 나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인생은 무상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가 삶을 통해 찾아야 한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모든 인간은 하늘로부터 이 지상에 내려왔다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길은 ‘상승의 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의 선교 역사에서 가장 비범한 선교사요 빼어난 신학자요 위대한 중재자 중 하나인 스탠리 존스(1884-1973)가 자기 생애의 만년인 1968년에 출간한 자서전 제목을 <<상승의 노래 A Song of Ascents>>(번역자는 <<순례자의 노래>>로 번역했다)라 붙인 것은 참으로 적절한 일이었다. 그는 머리말에서 “이 영적 자서전에서 나는 과거의 나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만들고 계신 나를 향해 순례하면서 노래를 부를 것”(27쪽)이라고 말한다.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만들고 계신 나’를 향한 순례의 여정이라는 것이다. <<순례자의 노래>>를 쓰기에 앞서 그는 출판을 포기한 자서전을 두 권이나 썼다. 첫 번째 책은 자기 삶의 여정에서 부딪힌 외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얼마 후 그는 그것을 버리고 자기 존재에서 일어난 내적인 변화의 사건을 중심으로 새 책을 썼지만 뭔가 미진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기 인생은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에 놓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세 번째 책을 쓰게 되었다. 인생을 가리켜 ‘계기적 실존’이라 말한 이가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는 어떤 계기들이 우리를 성숙의 길로 밀어올리거나 타락의 길로 끌어내린다는 뜻이리라. 스탠리 존스는 소년 시절 볼티모어 남부에 있는 프레더릭 에버뉴 감리교회의 주일학교에 가면서 종교와 접촉을 시작했다. 그때는 새 옷을 입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기부금 접시를 돌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싶어했을 뿐이었다. 그런던 그가 다소나마 회심을 경험한 것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메모리얼 처치에 온 한 강연자가 “젊은이 여러분,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는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메모리얼 처치에 온 순회 설교자 로버트 J. 베이트먼을 만나는 순간 스탠리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도 갖고 싶다”는 강력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그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혼에 들어오셨다. “확신, 받아들여졌다는 느낌, 화해를 이루었다는 느낌이 나를 감쌌다.”(48) 그 날은 영혼의 생일이었고, 길고 긴 순례자의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가장 거대한 선교현장 회심의 결과 그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에 발 맞추어 걷기 시작했고, 많은 방해 속에서도 그는 그런 방해를 영적 성숙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신앙의 길에 들어선 이들 누구나 경험하는 ‘어둔 밤’은 그에게도 찾아왔다. 자기 속에 있는 불온 것들, 즉 자아, 섹스, 집단이 그에게 충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충동은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것임을 깨달으면서 그는 더욱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서게 된다. 결점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주시고, 완성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믿는 이의 평안함이 그에게 찾아왔다. “성령께서 이제까지 ‘적지’(敵地)로 남아 있던 영역들, 곧 잠재의식의 영역들을 넘겨받아 우호적인 영토로 만드신다.”(99) 성령은 그를 내적인 성결의 길로 인도했다. 감리교 목사가 되겠다는 그의 소박한 꿈은 빈한한 가정 환경으로 말미암아 우회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볼티모어 법원 부속 법률도서관에서 일하고,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사의 직원이 되어 빈민구역에서 산업보험 가입자를 찾는 일도 했다. 그는 그런 과정을 거쳐 가난이 무엇인지를 체득했고, 스스로 “강인해짐과 동시에 인정 있는 사람”(117)으로 변화되었다. 이런 체험이 나중에 인도 선교사로 일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줄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들어간 애즈베리 대학은 감리교 정신이 지배하는 학교였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고, 세계를 교구로 삼는 이들의 선교 열정을 배웠다. 그는 마침내 필생의 과업이 된 인도 사역에 파송을 받게 되었다. “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도덕적․영적 혁명의 한복판에서 살아야 했다. 혁명기의 인도에서 복음 전도자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145) 언어를 배우고 목사의 직무에 충실했던 러크나우에서의 목회생활 4년 끝에 그는 자신이 진정한 인도에 화육한 사람이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집단 즉 특권을 부여받은 집단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는 결혼과 동시에 삶의 터전을 시타푸르로 옮겼고 그곳에서 불가촉천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전생의 악행으로 지금 고통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달리트들은 자기들에게 거리낌없이 다가오는 백인 선교사를 마음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새롭게 깨어나고 있는 인도의 지식인들과 정치 지도자들과의 정신 속에 그리스도를 심는다면 인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선교의 지평을 바꾼다. 이 대목은 참 아쉽다. 달리트의 문제는 인도 사회가 지금도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이다. 달리트들을 위해 사는 것과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추구하는 일, 어느 편이 십자가에 가까운 것일까? 다분히 혼합종교적인 경향을 보이는 힌두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는 고린도에 간 바울 사도처럼 비기독교 세계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한다(177). 그런 결단의 뿌리에는 “종교는 여럿이지만, 복음은 하나뿐”(189)이라는 확신이 놓여 있다. 다른 종교는 말에 그친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말씀이 육화된 종교라는 것이다. 복음과 종교를 갈랐던 칼 바르트의 입장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종교들에게 스탠리 존스의 이런 진술은 제 논에 물대기식의 논리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점에서는 타협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나 종교인을 폄하하거나 배척하지는 않는다. 그가 주목한 것은 현대인의 공허감, 환멸과 좌절, 참된 길을 잃었다는 의식이었다. 바로 그런 상황이야말로 그가 마주한 선교 현장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선교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집중된다. “나는 힌두교인이나 이슬람교인에게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고, 영적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했다.”(210)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의미였고, 소명에 대한 자각이었다.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삼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 중심의 대화인지, 그리스도 중심의 대화인지, 구원 중심의 대화인지에 따라서 그 대화는 변증이나 논증이 될 수도 있고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될 수도 있다. 스탠리 존스의 중심점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가 중심이기에 그의 복음은 현실 변혁적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공산주의․자본주의․자아․종파주의․미국식 생활방식 등 유한한 세계의 대척점에 서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현실 변혁적일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활동하는 목사가 그에게 한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당신은 골치 아픈 복음을 설교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설교하고, 그것은 지상의 어떤 것도 뒤집어엎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고, 그것은 지상의 모든 것을 뒤집어엎습니다”(241). 우주 안에 있는 힘의 중심 이런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인도 사회에 접근하는 스탠리 존스와 간디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인 사태였을 것이다. 어느 날 스탠리 존스는 간디에게 묻는다. “기독교를 인도에서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하려면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간디는 주저없이 말했다. “나는 네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당신네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십시오. 둘째, 당신네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십시오. 그 가르침의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저하시키지 마십시오. 셋째, 사랑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으십시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타종교들을 보다 호의적으로 공부하고, 그 종교들 속에 있는 선한 것을 찾아내고, 사람들에게 보다 호의적으로 다가가십시오.”(263) 힌두교도인 간디의 이 말은 예언자의 선포가 되어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간디의 이런 말은 현실 기독교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신앙은 신조나 교리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화육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신뢰이다. 또한 예수는 우리 신앙고백의 객체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속에 스며들어야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믿음은 삶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삶의 내용은 사랑이다. 사랑의 원리는 가름이 아니라 받아들임이다. 간디의 말은 우리 신앙의 정수를 꿰뚫고 있다. 스탠리 존스도 간디의 말을 철저히 긍정한다. 하지만 간디가 비폭력과 불살생이라는 생명의 원리를 붙잡으면서도 그 원리들의 창시자이신 분을 붙잡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한다. 간디는 십자가를 붙들지 않음으로써 인도인들과 동아시아인들을 사로잡고 있던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스탠리 존스는 힘, 중용, 무욕, 무심, 전능자, 마음의 평화, 우주적인 평화, 과학의 법칙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는 여러 종교나 철학을 제시한 후,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제시한다. “기독교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죄값을 지불하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우주 안에 있는 힘의 중심이라고 말한다.”(278) 이것은 매우 깊은 통찰이다. 십자가의 의미가 이 말 속에 오롯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의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성장주의는 변형된 힘의 숭상이 아닌가? 십자가라는 중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좌에 앉으신 상처입은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한 선각자의 외침을 들을 귀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선교사로서의 스탠리 존스의 삶의 지평은 인도를 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 러시아와 미국에까지 넓혀진다. 다이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소크라테스처럼 그도 내면의 소리에 이끌려 살아갈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처럼 살았다. 미국 감리교회로부터 감독직이 수여되었을 때, 그는 망설임 끝에 그것이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소명보다 앞서는 것일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감독직을 버렸다. “내 평생의 싸움 가운데 하나는 으뜸가는 것들을 가장 먼저 지키는 것이었다.”(413) “누구든지 ‘할렐루야 코러스’를 부르려면, 자기의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614) 꿈을 꾸며, 꿈을 살며 삶의 여정을 통해 얻은 사회적 영향력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실은 주님의 것이었다. 그는 1941년 미국에서 열렸던 전국 기독교 선교대회에 참여하고 막 인도로 돌아가려 할 때 “나는 네가 여기에 머물기를 원한다”는 내면의 음성에 이끌린다.(386) 그는 자신이 미국에 머물러야 하는 까닭은 임박한 미-일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명령임을 깨닫고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 노무라 제독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패가 곧 무의미인 것은 아니다. 전후의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인들은 스탠리 존스를 벗으로 받아들여 복음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중재사역은 그의 일생의 과업이었다. 그의 중재사역의 모토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엡2:15)라는 말씀이었고, 그 방법은 “각자를 변화시켜 보다 고차적인 입장에 이르게 하고, 각자의 참된 것을 한데 모으는” 것이었다(537). 그는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노력했고, 카렌족과 미얀마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썼으며, 국공합작 과정에서 분쟁 중이던 중국의 지도자들을 중재하려 노력했고, 콩고와 로디지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의 감리교회를 통합시키려는 노력이 성공을 거둔 것을 제외하면 실제로 그가 거둔 결실은 적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지엄하신 분에게 복종하는 것”(412)이었기에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중재 사역은 그를 ‘세계 정부 구상’으로 이끈다. 개별 국민국가의 팽창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세계 공화국’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공화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쩌면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원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견 세계 공화국에 대한 그의 꿈은 황당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신앙이 너무나 사사화된 오늘의 현실에서는 그런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다. 그가 다양한 교파로 나뉘어 있는 세계 교회가 연방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계를 위해 일하면서도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공동체 훈련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기독교 아슈람을 연다. 인종과 계급과 성과 연령의 장벽을 가로지르는 ‘성령의 사귐’을 맛보기 원했던 것이다. “그것은 썩어가는 사회에서 새로 태어나는 사회였다. 그것은 단체와 교회를 성장시키는 혼이자, 조직을 성장시키는 유기체였다.”(459) 삿 탈 아슈람은 전 세계에 퍼져나간 기독교 아슈람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교류를 위해 그가 택한 것은 원탁회의였다. 다양한 종교에 속한 이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자기들의 경험을 나눔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물론 그는 그 원탁회의를 통해 그들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은 배려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판단하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보면 된다. ‘나는 얼마나 넓게 얼마나 깊이 느끼고 반응하는가? 나는 얼마나 넓게 얼마나 깊이 마음을 쓰는가?’”(577) 이 말은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피에르 신부의 말을 연상시킨다. 그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즉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했다. 스탠리 존스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이었다. 김순현 목사의 빼어난 번역을 통해 스탠리 존스와 지낸 며칠은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 순례자의 노래가 가능했던 것은 화해와 일치와 하나님과의 친밀이라는 현(弦)과, 아슈람과 원탁과 중재사역과 배려라는 음표가 성령이라는 연주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평범한 한 사람이 어찌 이리도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권능, 곧 성령을 붙잡았기 때문이다.”(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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