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만파식적의 꿈 2006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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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의 꿈 가을이 왔으나 가을 같지 않은 기온입니다. 가을 가뭄이 극심하여 나뭇잎들도 단풍을 만들지 못하고 오그라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시절의 리듬을 타야 아름다운 법인 데, 세상살이에 두서가 없다보니 자연도 몸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며칠 전 설악산을 다녀온 후배는 구룡영 쪽에서 만난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분주함 속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저로서는 그의 여유가 참 부러웠습니다. 생각해보면 안달복달할 것 없는 인생인데, 왜 이리도 허둥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은 정말로 아끼는 사람에게 한가로움이라는 여유를 준다는 데, 한가로움은 제 팔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치부하고 지냅니다. 지금도 오후 시간에는 여전히 산책을 즐기시겠지요? 그 철학적 산보에 나도 꼭 동참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한반도에 드리우는 죽음의 그림자를 불길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해질녘이 되어 찾아오는 어둠은 품이 되어 우리를 감싸지만, 한낮에 찾아오는 어둠은 묵시문학적 공포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거부했던 이집트에 덮였던 사흘 동안의 어둠, 저는 지금 이집트인이 되어 그 날의 불길함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궁지에 몰린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살 권리를 보장받으려고 하고, 국제사회는 발빠르게 북한을 제재하는 일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신속할 수가 없습니다. 국내의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갑니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면서, 분쟁을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을러댑니다. 역사의 길항 작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해도, 명철하고도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이들의 목에 드러난 핏줄이 참 위태로워 보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평화를 미워하는 이들 곁에 머물러왔다고 노래하는 히브리 시인의 탄식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즈음입니다.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으르렁거린다지요? 잘 살기 위해 밖으로만 떠도느라고 돌봄을 받지 못한 우리 마음은 이미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의를 마치 독점한 것처럼 큰소리치는 영웅주의자들의 소리가 이제는 소음처럼 듣기 싫어졌습니다. 누구라도 일어나 미움과 전쟁을 부추기는 이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해야 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수다장이 테르시테스를 기억하시는지요? 트로이 전쟁이 9년 차에 접어들자 군인들은 점차 그 무의미한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이타카 출신의 장군 오뒷세우스가 일어나 아카이아 인들의 함선들 사이로 나아가 겁쟁이처럼 겁을 내는 것은 자유인의 이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전쟁을 독려하지요. 그의 목소리는 노호하는 바다의 물결이 해안에 부딪쳐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답니다. 그가 막사에 돌아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침묵하고 있었지만, 테르시테스 혼자서 전쟁주의자인 왕들을 비난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이익을 보는 것은 결국 왕 뿐이라는 것이지요. 아가멤논의 막사에 아리따운 여인들이 늘어나는 것, 장군들의 막사에 명예의 선물, 곧 전리품이 늘어나는 것 말고 전쟁이 주는 이익이 무엇이냐고 그는 투덜거립니다. 정말 비겁한 것은 전쟁을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임을 그는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영웅들의 시대에 테르시테스 같은 이의 존재는 그 자체로 부끄러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호메로스는 그래서인지 그의 용모를 아주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일리오스에 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못생긴 자로 안짱다리에다 한 쪽 발을 절었고, 두 어깨는 굽어 가슴 쪽으로 오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어깨 위에는 원뿔 모양의 머리가 얹혀 있었고, 거기에 가는 머리털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제2권 215-220행) 수다쟁이 테르시테스의 말은 자칫하면 일사불란한 아카이아인들의 강철대오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폭약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아가멤논의 홀(笏)을 들어 그의 등과 어깨를 내리칩니다. 맷자국이 벌겋게 솟아오르자 그는 겁에 질려 자리에 앉았고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당황한 얼굴로 눈물을 닦습니다. 이 보잘것 없는 사내가 제 뇌리에 자꾸만 떠오르는 까닭인 무엇인지요? 그는 ‘벌거숭이 임금님’의 벌거벗음을 폭로한 아이처럼 거짓과 위선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야 할 소리를 합니다. 비록 그 때문에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할지라도 말입니다. 나중에 그는 아카이아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토로이를 지원하던 아마존 여인국의 여전사 펜테실레이아를 죽인 후 잠자듯 고요한 그녀의 자태에 넋이 빠진 아킬레우스를 보며 ‘네크로필리아’라며 비난했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지금 우리는 아킬레우스처럼 죽임에 매혹당하고 있는 이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따져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전우익 선생님은 무슨 주문이라도 외워서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미친 바람을 잠재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투기 바람, 조기 교육 바람, 영어 교육 바람, 성장주의의 바람…. 스페인의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라만차의 바람이 그 지역 사람들을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든 영혼은 고요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 미친바람을 잠재울 수는 없을까요? 전쟁의 광풍이 불고 있던 삼국시대에 신라의 민중들은 참 멋진 꿈을 꾸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오는 그 이야기가 왜 그리도 가슴 떨리게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신문왕 때 일입니다. 동해에 있는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를 향해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했더랍니다. 사람들이 나가보니 산세는 거북이 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그루 대나무가 있어서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일관이 왕께 아뢰기를 이것은 매우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하자, 왕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그 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玉帶)를 왕께 바쳤습니다.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고 묻자 용은 그것은 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라고 말합니다. 왕은 그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어 월성에 있는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개이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습니다. 왕은 그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피리 하나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름의 파도를 잠재우고, 서로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성마른 외침소리도 그치게 하고, 군비경쟁의 광풍도 전쟁의 광풍도 멎게 하는 피리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너무 허황된가요? 낮이면 둘로 나뉘지만 밤이 되면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부터 찾아야 하겠네요. 낮은 하나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밤은 수천 개의 눈을 가졌다지요? 너와 나를 가르고,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고, 죄인과 의인을 가르고, 적과 아군을 가르는 낮 동안은 사랑이 숨을 죽이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차이를 넘어 서로의 품이 되어주는 밤은 사랑의 시간입니다. 그 고요한 시간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와 아픔을 안타까워하며 서로를 사랑으로 보듬어 안을 때 상처는 빛으로 바뀔 겁니다. 정현종 시인의 <꽃피는 상처>는 우리가 상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남북이 갈린 자리 땅 위에도 마음속에도 상처가 깊었다. 피가 계속 흘렀으나 체제들은 그걸 고치려 하기는커녕 나쁜 목적을 위해 그걸 이용했다. 상처를 이용하다니! (계속되면 죽는데) 출혈을 이용하다니! 남의 상처도 아닌 제 몸의 상처를! 그 상처로 아픈 사람은 그걸 고칠 힘이 없었고 힘이 있는 사람은 아프지 않았다. 이 민족의 삶은 그리하여 출혈이 심하고 꼬이고 꼬여왔다. 마음 고생도 크고 몸 고생도 컸다. 무겁고 힘들었다. 시인에게 남북이 갈린 자리는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상처입니다. 남과 북 어느 한편의 상처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모두의 상처입니다. 그 상처, 그 출혈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둘 다 죽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자는 그걸 고칠 힘이 없고, 힘이 있는 자는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민족은 빈사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무슨 소리를 듣습니다. 이 땅의 어딘가가 근질근질 몸이 풀리는 소리를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얼음이 녹는 소리, 녹아 봄 햇빛 아래 반짝이는 소리, (잘돼야 할 텐데) 아픈 데가 나으려는지 이 땅의 어디어디 근질근질 풀리는 소리, 온갖 동식물들 수런대는 소리, (나쁜 마음으로 하면 안 되는데) 얘기가 통해 피가 통해 근질근질 수런대는 소리 드리는 것 같다. 아, 꽃피는 소리 (그래야 할 텐데) 상처에서 꽃피는 소리! 아, 시인이 들은 소리는 빈사상태에 빠졌던 이 한반도라는 몸에 피가 통하고 온기가 통해 근질근질 생명이 수런대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상처에서 꽃피는 소리입니다. 시인이 이 소리를 들은 것은 1992년 원단입니다. 그로부터 십 수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상처에서 꽃이 피는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꽃이 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를 거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한파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 겨울을 잘 지나야 합니다. 더디지만 겨울에도 나무는 자라게 마련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한 겨울에 편도나무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자 편도나무는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두려움의 겨울을 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희망의 꽃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만파식적의 피리는 다름 아닌 우리들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순간 제 마음에 오네요. 평화를 빕니다.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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